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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知行네트워크</title>
		<link>http://jihaeng.net/blog/</link>
		<description>침묵하는 지식이 아닌 행동하는 지식을 꿈꾸는 사람들의 대안연구공간 : 知行네트워크</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Sat, 08 Aug 2009 06:56:4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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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남일당 아래에서 우리는 모두 난쟁이입니다(오창은)</title>
			<link>http://jihaeng.net/blog/142</link>
			<description>&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24pt&quot;&gt;&lt;STRONG&gt;남일당 아래에서 우리는 모두 난쟁이입니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18pt&quot;&gt;- 용산 참사 200일과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 TEXT-ALIGN: righ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오창은(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SPAN&gt;&lt;/P&gt;&lt;br /&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quot;&gt;현대문학사의 결정적 장면들&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한국 현대문학사에는 손에 꼽을 만한 몇가지 인상적 풍경들이 있다. 그 중 몇가지 결정적 장면은 1970년대에 이문구?황석영?조세희가 펼쳐 보였다. 이문구의 「우리동네 김씨」에서 김씨가 민방위 훈련에서 부면장 상대로 권위주의와 강렬한 풍자로 대결하는 장면은 암울했던 시대의 풍경을 민중적 웃음으로 통쾌하게 그려냈다. 황석영의 중편 「객지」의 결말도 숭고미를 자아낸다. 동혁이 &quot;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quot;고 외치는 결말에서 &#039;절망의 넘어선 희망&#039;을 발견하면, 뭉클해진다.&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나는 조세희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그려낸 장면이 그 중 압권이라고 생각한다. 난쟁이 가족이 철거 바로 직전에 마루에서 구운고기와 고기국에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철거 직전에 망치를 든 사람들 앞에서 식사를 하는 이 장면은 한국문학사의 가장 비극적이면서 슬픈 풍경으로 꼽을 수 있다.&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난쟁이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던 지섭은 철거 용역들에게 다음과 같은 상징적 언어를 내뱉는다.&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TRONG&gt;&quot;지금 선생이 무슨 일을 지휘했는지 아십니까? 편의상 오백 년이라고 하겠습니다. 천 년도 더 될 수 있지만, 방금 선생은 오백 년이 걸려 지은 집을 헐어 버렸습니다. 오 년이 아니라 오백년입니다.&quot;&lt;/STRONG&gt;&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지섭의 항변은 &#039;민중의 역사, 노비의 역사&#039;를 압축해 제시하기에,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먹먹해지는 울림을 전한다. &#039;오백 년&#039;의 상징적 언어지만, 거기에는 슬픔?울분?저항?폭력?압제?좌절?재생의 역사가 기입되어 있다. 권력의 아래에서만 삶을 영위해야 했던 민중의 아픔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 울림의 크기를 넉넉히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lt;/SPAN&gt;&lt;/P&gt;&lt;br /&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quot;&gt;한 수인의 고백&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나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이 장면을 지난 6월 수원 구치소에서 수용자들과 함께 읽은 적이 있다. 인권연대에서 주관하는 &#039;평화인문학&#039; 강의에 강사로 참여해 10명의 수용자들과 &#039;인문학적 책 읽기&#039;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 책이 텍스트로 선정된 것이다. 한 달 동안 이뤄진 강의에서 나는 누군가와 처지에 깊이 공감한다는 것에 관해 열심히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갇힌 자들의 슬픔에 대해 공감하기도 했고, 아래로부터 삶을 다시 살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도 했다.&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그런데, 나는 수원 구치소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경험을 했다. 30대 초반의 한 수용자가 주저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었는 지 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철거를 담당한 &#039;망치를 든 사람들&#039;과 자신이 동일시되는 경험을 했고 토로했다. 그리고, 자신이 했던 행위가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바깥 세상에 있을 때, 구청에서 바로 재개발 업무와 관련된 업무에 종사했다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했다. 그가 &#039;사색의 공간&#039;이기도 한 감옥에서 &#039;인문학 강의&#039;를 위해 읽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039;자기 역전(逆轉)&#039;의 경험을 안겨주었던 듯하다. 그는 한 때 자신이 국가기구, 혹은 공권력의 위임을 받아 폭력을 행사하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국가기구에 의해 수인이 되어 갇힌 상태에 있다. 저절로 자신에게 위임되는 줄로 알았던 권력이, 그래서 항상 정당하다고 믿으려고 했던 권력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 고통스러운 역전의 과정이 그에게 &#039;두려움&#039;을 느꼈던 듯하다.&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문학 작품은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인물과 공감하는 길을 열어 준다. 그래서 인문학적이다. 누군가는 난쟁이 아버지에 공감할 것이고, 누군가는 지섭에 공감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둘째 아들 영호에게 공감할 수도 있다. 그 다양한 길을 문학 작품은 갈무리하고 있어 &#039;타인의 삶&#039;에 깊이 공감하게 해 주고, 읽는 이가 &#039;다른 삶의 가능성&#039;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준다. 그것이 두려울 지라도, 이성적 이해를 넘어선 깊은 공감이 &#039;타인의 고통&#039;을 &#039;나의 고통&#039;으로 받아들이는 길인 것이다.&lt;/SPAN&gt;&lt;/P&gt;&lt;br /&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quot;&gt;남일당 앞에 선 부끄러움&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나도 그 수영자가 겪었던 &#039;고통스런 역전&#039;을 지난 8월 3일에 절절히 경험했다. 6.9 작가선언이 기획한 &#039;용산 릴레이 실천&#039;에 참여해 용산참사의 현장인 남일당 앞에서 8시간여 동안 동료 작가들과 시위를 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현장이 바로 용산 남일당이고, 그 곳에 우리 시대의 참혹한 풍경이 펼쳐져 있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현장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지난 1월 20일 용산 참사가 발생한 이래, 정부와 서울시는 철저하게 사건을 외면하고, 대화도 거부했다. 이는 지난 80년 광주 대학살 이후 정치권력이 취한 태도와 너무 흡사하다. 외면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고, 망각의 심연에 &#039;학살의 진상&#039;을 은폐하려 한다. 용산참사와 80년 광주의 대학살은 동일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명박 정권의 비민주적 치부의 현장이 바로 남일당이고, 용산 4지구이다. 나는 다시 한번 유족의 슬픔에 공감하며, 현장에서 이를 확인했다.&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나는 레아 호프의 상황실에서 용산 4지구의 풍경을 바라보고, 유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039;참여하지 않는 공감&#039;이 얼마나 무력한가에 대해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두 명의 미국인은 시위를 하고 있는 내게 &#039;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039;하고 물었다. 나는 &#039;정부에 의해 학살이 자행됐다&#039;고 했다. 그러자 그가 &#039;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가&#039;라고 다시 질문했다. 나는 순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릴레이 시위에 참여한 지난 3일은 용산참사가 발생한 지 196째였고, 7일이면 고통의 나날이 200일에 접어든다.&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한국 민주주주의 짓밟힌 지 200여일에 이르고 있다.&lt;/SPAN&gt;&lt;/P&gt;&lt;br /&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LINE-HEIGHT: 1.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더불어, 우리 모두는 남일당 아래에서 난쟁이가 되어 왜소해지고 있다.&lt;/SPAN&gt;&lt;/P&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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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42</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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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8 Aug 2009 06:53:20 +0900</pubDate>
		</item>
		<item>
			<title>껍데기는 가라!: 버려지는 사람들과 새로운 정치(하승우)</title>
			<link>http://jihaeng.net/blog/141</link>
			<description>&lt;STRONG&gt;&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껍데기는 가라!: 버려지는 사람들과 새로운 정치&lt;/STRONG&gt;
&lt;br /&gt;
&lt;P align=right&gt;하승우(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P&gt;
&lt;P align=left&gt;&lt;br /&gt;&lt;FONT size=3&gt;신문을 뒤적이기가 무서울 정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점점 배제되어 버려지고 있고, 그 속도마저 계속 빨라지고 있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철거민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동네에서 버려지고 있고,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해 온 공장에서 버려지고 있다. 농업선진화라는 이름 아래 농민들은 평생 일궈온 땅에서 내몰리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동안 쥐꼬리만큼 받아오던 복지혜택에서조차 내몰리고 있다. 한국사회의 필요라는 이름 아래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들은 인간이 아니라 도구처럼 쓰였다 버려지고 있다. 학력 신장이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은 무한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고, 얼마 전 신문기사에 따르면 생활비 마련을 위해 청소년들이 성매매에 내몰리고 있다.&lt;br /&gt;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이런 사람들에게 ‘테러리스트’, ‘불법 점거’, ‘폭력시위단체’, ‘떼거리’, ‘무능한 인간’, ‘좌익’, ‘패륜’, ‘매국노’같은 딱지를 붙이며 그런 버림을 정당화하고 있다. 심지어 21세기에 ‘빨갱이’나 ‘간첩’이라는 말마저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기득권층과 그들을 보호하는 공권력은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거나 그 기준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이 사회 밖으로 거칠게 내몰고 있다(경찰청은 철거민들을 테러리스트로 보고 대응하는 훈련을 하는가 하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용산참사가 공권력 발동을 주저하게 만들어 한탄스럽다며 쌍용차 평택공장에 즉각 공권력을 투입하라고 요구하고 있다).&lt;/FONT&gt;&lt;/P&gt;&lt;FONT size=3&gt;
&lt;P align=left&gt;&lt;br /&gt;단지 버려지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서 더욱더 두려운 건 아니다. 두려운 건 이런 배제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과 이를 바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희망이 있다면 버티며 미래를 준비해 보겠지만, 희망조차 꿈꿀 수 없다면 미래는 불가능하다. 앞으로의 일이 이미 결정된 세계에서는 더 이상 희망(希望)이나 미래(未來)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상황에서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희망의 목표나 기준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lt;/P&gt;
&lt;P align=left&gt;&lt;br /&gt;그런 목표나 기준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시야가 정치를 청와대나 국회, 몇몇 정당들, 몇몇 시민사회운동단체들로 제한되어 정치의 부정적인 면밖에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치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자 시야를 아래로 낮춰 풀뿌리나 지역공동체 차원의 긍정적인 정치를 보려 하면 그런 점은 한국 사회 전체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을 듣기 십상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국가 차원의 정치나 제한된 대안이라 여기는 지역 차원의 정치 모두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정치의식은 갈증을 호소하며 무작정 사막을 헤매고 있다. 하지만 방향을 알려주는 좌표가 없기에 헤맨다고 한들 오아시스를 찾을 가능성은 낮고 까마귀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lt;/P&gt;
&lt;P align=left&gt;&lt;br /&gt;그래서 새로운 좌표를 알려줄 새로운 정치전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새로운 프레임은 무조건 새로운 말을 끌어다 쓴다고 갖출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수정치가 생활밀착형 정치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서 새로운 프레임을 갖추는 게 아니다. 생태나 평화, 자치같은 말을 정당의 구호로 끌어들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 검찰이 ‘공안’이라는 말 대신 ‘민생’이라는 말을 써서 ‘공안정국’, ‘공안부’ 등의 이미지를 바꾸려 해도 그 속성을 바꿀 수 없는 점과 같다. 프레임은 단어가 아니라 관점을 가리킨다. 보는 방법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이듯이 새로운 관점을 갖춰야 새로운 정치를 시작할 수 있다. &lt;br /&gt;그리고 이 새로운 관점은 새로운 상황, 즉 버려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 기득권층의 정치전략이 ‘한 가족’, ‘하나의 공동체’라는 말을 쓰며 사람들을 한데 뭉치려 했다면, 이제 그들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내버리고 있다. 철거민이 테러리스트로 불리는 순간, 노동조합이 폭력시위단체로 불리는 순간 그들과는 어떠한 타협이나 협상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이들은 다시 공동체로 들어올 수도 없다.&lt;/P&gt;
&lt;P align=left&gt;&lt;br /&gt;따라서 새로운 정치전략은 ‘버림받음’이라는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갖춰야 한다. 새로운 관점이라 해서 인터넷과 같은 과학기술에만 의존하거나 과거의 모든 것을 낡은 것으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시선이다. 내가 익숙한 높이와 방향에서, 그리고 내가 속한 정파(이념이 아니다!)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그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그렇지 않으면 자기 귀에 익숙한 단어만을 조합해 풀뿌리 민중의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익숙한 오해와 착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백날 소통을 떠들어 봐도 자신의 오만함과 확신만 더할 뿐이다.&lt;br /&gt;그렇게 다양한 목소리를 더욱더 많이 듣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고, 정치의 구조 자체를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오는 방식으로 바꿔나갈 때 그 관점은 새로운 이념으로 구성될 수 있다. 어려운 말이나 새로운 말을 쓰며 폼 잡을 게 아니라 낡은 언어라도 그것의 진정성을 보여줄 때 우리는 민중의 가슴과 소통할 수 있다.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 민주주의를 실현할 방법을 차근차근 준비하지 않는다면 무너질 사랑탑만 쌓는 격이다.&lt;/P&gt;
&lt;P align=left&gt;&lt;br /&gt;그리고 그 관점과 이념은 기존과는 다른 정치전략을 가져야 현실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시국선언이나 대변형 운동은 기본적으로 기득권층이 사회적 포섭전략을 쓸 때에나 힘을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을 버리려 하는 지금의 기득권층은 그런 소리를 들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기자회견을 열고 보도자료를 뿌려도 방송이나 신문에서 보도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모일 수 없도록 광장만 잘 틀어막고 있으면 된다는 게 그들의 상식이다.&lt;/P&gt;
&lt;P align=left&gt;&lt;br /&gt;이런 상황에서는 ‘단결투쟁’, ‘결사항전’같은 구호도 잘 먹히지 않는다. 그 투쟁의 치열함이나 처절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버려지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사회에서 버려지는 사람들의 단결은 그 뒤에 버려지게 될 사람들의 연대가 아니라 그들의 외면이나 냉소를 낳기 쉽기 때문이다.&lt;/P&gt;
&lt;P align=left&gt;&lt;br /&gt;현실의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움직일 것이라 기대하는 건 큰 착각이다. 관계가 우리의 희망이기는 하지만 그 희망은 그 관계망이 어느 정도 다져진 뒤에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대에는 서로의 관계가 반드시 좋은 쪽으로만 드러날 수 있다고 미리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lt;/P&gt;
&lt;P align=left&gt;&lt;br /&gt;그렇기에 새로운 정치전략은 버려지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모색할 수 있는 터전을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 터전이 국가인가, 지역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우리를 언제쯤 버릴까 가슴 졸이며 그 날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과감히 그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모색할 양산박을 하나씩 만들어야 희망과 미래를 꿈꿀 수 있다. 그래서 무한경쟁에서 밀려났기에 버려져야 할 무능한 존재라는 딱지를 스스로 떼어내고 자신을 중요한 정치주체라 여기도록 만들 과정을 만들어 줄, 디딤돌을 놓아 줄 정치전략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민중은 아우성을 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설 것이다.&lt;/P&gt;
&lt;P align=left&gt;&lt;br /&gt;신동엽 시인은 노래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拏)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lt;br /&gt;&lt;/P&gt;&lt;/FONT&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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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민중</category>
			<category>버려지는 사람들</category>
			<category>정치전략</category>
			<category>지역공동체</category>
			<category>하승우</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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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jihaeng.net/blog/141#entry141comment</comments>
			<pubDate>Mon, 13 Jul 2009 12:09:08 +0900</pubDate>
		</item>
		<item>
			<title>다시 &#039;독재&#039;를 생각한다(김원)</title>
			<link>http://jihaeng.net/blog/140</link>
			<description>&lt;P align=center&gt;&lt;FONT size=3&gt;&lt;STRONG&gt;다시 &#039;독재&#039;를 생각한다 &lt;br /&gt;&lt;/STRONG&gt;&lt;/P&gt;&lt;/FONT&gt;
&lt;br /&gt;
&lt;br /&gt;
&lt;P align=right&gt;&lt;FONT size=3&gt;김 원(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FONT&gt;&lt;/P&gt;
&lt;br /&gt;
&lt;br /&gt;
&lt;P&gt;&lt;FONT size=3&gt;&lt;STRONG&gt;민주주의 vs 독재 &lt;/STRONG&gt;&lt;/FONT&gt;&lt;/P&gt;
&lt;br /&gt;
&lt;P&gt;&lt;FONT size=3&gt;노무현 사망이후 민주주의, 독재 등 말이 등장하고 있다. &#039;담론&#039; 차원에서. &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3&gt;담론이라는 면에서 독재나 민주주의가 세력관계를 반영한 적이 오랜 되었는데, 좀 새삼스럽다. &lt;/FONT&gt;&lt;/P&gt;
&lt;br /&gt;
&lt;P&gt;&lt;FONT size=3&gt;그럼 &#039;독재&#039;란 무엇일까?&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3&gt;담론 수준에서 독재는 &#039;군부지배&#039;, &#039;일당-일인의 전횡적 통치&#039;, &#039;억압적 통치&#039; 등이 아닐까? 요즘 보수정당이나 일부에서 자주 쓰는 &#039;소통의 부재&#039;란 아마도 시민사회와 반대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행정부와 다수 여당이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행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좀 꼼꼼하게 살펴보자면, 이는 시민사회내 다양한 요구를 정당이나 정책을 통해 대변하지 못하는 &#039;이익매개 기능&#039;의 약화라고 해석 가능하다. 이는 곧바로 &#039;정당정치의 미발전&#039;으로 이어진다. 예전 말로 치자면, 민의를 대의제가 대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3&gt;하지만, &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3&gt;되돌이켜 보면 이전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시기에는 소통이 잘 이루어졌나 질문하면 그 역시 아니다. 포플리즘적 통치에 기초한 정당제와 대의제의 약화는 2000년대 내내 지속된 현상이다. 그래서 최장집이 &#039;민주화 이후 민주주의&#039;라고 비판했고, 시민들에게 지적인 충격을 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3&gt;그렇다면, 왜 독재나 소통 결여란 문제가 제기될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보자. MB정권은 이전 정권에 비해 공권력으로 상징되는 억압적 국가기구의 사용이 잦다,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 등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이 강력하다 등이 이를 보여주는 주된 현상들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전 정권에도 사회운동 등에 대한 탄압은 존재했고, 억압적 국가기구도 작동했다. 불안정노동, 구조조정, 노사관계로드맵 등을 기억하면 된다. 다만 우리는 너무 쉽게 잊을 뿐이다. 물론 억압적 국가기구 작동이 이전보다 노골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독재라고 부르는 근거는 아니다. 이는 &#039;대안&#039;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독재를 부르는 순간, 그 대안은 민주주의가 되고, 대안-담론 수준의 민주주의는 정상적인 정당정치, 소통의 원활 등으로 좁혀진다. 다시 1987년 수준의 민주주의로 회귀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독재라는 담론을 사용하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lt;br /&gt;&amp;nbsp;&lt;br /&gt;본질적으로 보면 모든 자본주의 국가와 정권은 독재이다. 반동적 독점자본의 정치적 테러독재 형태를 아주 예전에 파시즘이라 불렀듯이, 자본주의 국가는 모두 부르주아 독재이다. 다만 정권 형태의 차원에서 &#039;누가 집권&#039;했냐에 따라, 반동적 부르주아지냐 아니면 자유 부르주아지냐에 따라 그 형태상 차별성이 나타날 뿐이다. 이런 엄밀한 논의를 떠나서, 담론 수준에서 독재에 대항해 투쟁하자고 대중들에게 외치면, 대중들은 &#039;민주주의&#039;를 요구할 것이고, 그 민주주의는 87년 제8차 개헌에서 규정한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즉 민주주의의 계급성이 아주 쉽게 망각된다는 것이다. 지금 운위되는 민주주의는 이른바 독점자본의 정치적 외피로서 민주주의이다. 그 외피에 상처를 내는 반동적 부르주아지들의 지배에 대항하자는 것이 현재 시점이다. &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3&gt;이 이야기를 하니, 문득 18년전 논쟁이 머릿 속에 떠오른다. 1991년 5월 강경대 군의 테러 치사 사건이후 사회운동은 1달이 넘게 거리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다들 파쇼타도-민주주의를 외쳤지만, 문제는 대안이었다. 에피소드같은 논쟁이었지만, 어느 세력은 &#039;파쇼 타도-민주주의 쟁취&#039;를 외쳤다. 여기서 &#039;민주주의가 무엇이냐?&quot;란 문제가 떠올랐다. 그 안에서도 한편은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를, 다른 한편은 민주주의 임시정부 아니면 과도정부 슬로건을 외쳤다. 적어도 당시 NL이 주장했던 &#039;국회해산-즉각 총선&#039;은 대안이 아니므로, 노동자 권력을 위해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그에 비해 2009년은 많이 후퇴한 셈이다. 물론 제헌권력, 국민소환 등이 제기되지만 아직은 논쟁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싶다. &lt;/FONT&gt;&lt;/P&gt;
&lt;br /&gt;
&lt;br /&gt;
&lt;P&gt;&lt;FONT size=3&gt;&lt;STRONG&gt;공권력의 항상성 &lt;/STRONG&gt;&lt;/FONT&gt;&lt;/P&gt;
&lt;br /&gt;
&lt;br /&gt;
&lt;P&gt;&lt;FONT size=3&gt;이렇게 긴 이야기를 내가 해버린 하나의 이유는 &#039;독재&#039; 란 담론이 지닌 자기 한계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사용하더라도 써야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인지되지 않았을 때, 민주주의 투쟁은 대안을 스스로 형성하지 못하고 소멸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039;억압적 국가기구&#039;, 이른바 공권력의 문제다. 일단 전제해야 하는 것은 현재 국가기구의 작동은 80년대적인 것은 아니란 점이다. 이른바 국가-자본관계에서 자본의 지배력이 전일화된 상황에서, 공권력의 동원은 과대성장한 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탄압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은 자신의 장기적 정치이익 - 이른바 경제위기 극복이나 사회안정 등 - 을 위하여 공권력의 노골적인 사용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총자본과 국가간 이해의 수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MB정권은 자본분파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능력을 지녔기에, 공권력을 주로 하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3&gt;다시 17년전으로 돌아가 보자. 그 시절, 이른바 &#039;이완된 독재&#039; 혹은 &#039;시민사회의 팽창&#039; 등이 논의되며, 국가권력과 전면적인 투쟁인 &#039;기동전&#039;이 아닌, 시민사회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포위하고 이들을 장악하는 진지전 논의가 &#039;그람시&#039;를 원용하며 사회운동에 들어왔다. 다만 그때는 그람시를 아주 잘 못 이해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039;국가=억압&#039;, &#039;시민사회=헤게모니&#039;라는 얼토당치 않은 말을 그람시가 말한 것처럼 해석했다. 물론 그람시 소개서중에 그런 해석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람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자본주의 국가는 늘 억압적이며, 최종 순간에 자본(총자본)을 방어하기 위해서 강제력을 준비하고 예비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이며 억압적 국가장치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작동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현재 억압적 국가기구의 작동은 &#039;독재&#039;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가 총자본의 장기적 정치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자율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나타난 상황이다. 아주 &#039;자연스러운 작동&#039;이라고 할 수 있다. &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3&gt;시국선언이 확대되는 와중에 &#039;시민사회는 독재에 맞서고 있다&#039;는 주장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시민사회는 이념적인 면에서나, 조직적인 면에서 분화가 공고화된 상태이다. 지금 시국선언은 시민사회내 MB정권의 공권력의 과잉 사용과 시민사회내 이익매개 기능의 단절을 비판하며 나온 - 모두가 아니지만 적어도 최대 반대연합이란 의미에서 - 현상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독재와 소통의 부재라는 현실 진단은 매우 제한적이고 현재 상황에서 사회운동의 대안을 스스로 제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대안이 퇴영적인 만큼 설득력을 시민사회에서 좀 더 넓게 가지기 어렵다는 말이다. 혹자는 87년 6월 이전을 회고하며, &#039;좀 더 대중적인 슬로건&#039;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별로 대중적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시민사회내 존재하는 대항세력의 입지를 좁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lt;/FONT&gt;&lt;/P&gt;
&lt;br /&gt;
&lt;br /&gt;
&lt;P&gt;&lt;FONT size=3&gt;&lt;STRONG&gt;죽음 곁의 현상에 주목해 보자 &lt;/STRONG&gt;&lt;/FONT&gt;&lt;/P&gt;
&lt;br /&gt;
&lt;br /&gt;
&lt;P&gt;&lt;FONT size=3&gt;추모정국에서 형성된 민주주의-독재 전선을 이동시켜야 한다. 그 이유는 현재 전선이 가진 한계가 너무 명확하기에 그러하다.&amp;nbsp;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민주주의인지에 대해 대중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역시 이 점에서 나는 죽음으로 형성된 추모정국의 생명력보다는, 금융위기 이후 형성되고 있는 대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 죽음과 추모에서 한 발 떨어져서 추모 주위에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볼 시간이다. &lt;br /&gt;&lt;/FONT&gt;&lt;br /&gt;&lt;br /&gt;&lt;/P&gt;&lt;/TD&gt;&lt;!--start_signature--&gt;
&lt;P&gt;&lt;br /&gt;&amp;nbsp;&lt;/P&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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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김원</category>
			<category>독재</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40</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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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9 Jun 2009 14:32:25 +0900</pubDate>
		</item>
		<item>
			<title>인도산 고추와 한국의 야 3당(이승원)</title>
			<link>http://jihaeng.net/blog/139</link>
			<description>&lt;P class=EC_HStyle0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FONT size=3&gt;&lt;STRONG&gt;인도산 고추와 한국의 야3당&lt;/STRONG&gt;&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r /&gt;&lt;/P&gt;
&lt;P class=EC_HStyle0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lt;FONT size=2&gt;이승원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원위원)&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lt;br /&gt;&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lt;FONT size=2&gt;인도산 부트 졸로키아 고추&lt;/FONT&gt;&lt;/SPAN&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lt;br /&gt;&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얼마 전 직장 일로 동남아 국가의 한 수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 체류 마지막 날 지역단체의 초청으로 조촐한 저녁식사가 마련되었다. 식사 중 반찬으로 매운 고추로 만든 양념장과 식초에 저린 고추가 추가로 제공되었다. 각 국의 참석자들은 저마다 매운 음식에 대한 자부심으로 양념장과 저린 고추를 즐겼고, 나도 “한국 사람은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라는 말과 함께 저린 고추를 한 입 물었다. 헉! 내가 매운 음식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도 그랬지만, 역시 햇볕 강한 나라에서 재배된 고추라 그 매운 맛이 우리의 청양고추가 비교되지 못할 정도로 눈에서 눈물을 쏙 빼놨다. 타는 혀에도 불구하고 표정이야 어떻게든 감출 수 있었지만, 이미 벌겋게 상기된 눈 주위와 볼은 함께 한 참석자들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할 수 밖에 없었다. &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lt;br /&gt;&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고추 하나로 웃고 즐기는 동안, 내 곁의 파키스탄 학자 한 분이 우리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많은 사람들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모든 사람들이 고추를 즐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와 달리 잘살지 않으면 매운 고추를 잘 먹지를 못하는데 그 이유를 아느냐는 것이다. 출장던 방영된 ‘스파이스 루트’라는 향신료 관련 MBC 다큐를 보고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는 인도산 ‘부트 졸로키아’로 그 매운 맛이 우리 청양고추의 100배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인도 등 남아시아인들은 우리가 고추장을 먹듯 고추, 후추, 식초, 새우젓갈 등을 섞은 ‘삼발’이라는 소스를 일상에서 즐긴다고 한다. 당일 저녁 저린 고추와 함께 우리가 맛본 양념장이 바로 ‘삼발’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식 때문에 우리가 파키스탄 학자의 질문에 당황하며 답을 말하지 못할 때, 그 분은 웃으며 짧게 답을 이야기 해주었다. &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lt;br /&gt;&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물 때문입니다.”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 아시아, 특히 남아시아에서 식수는 대단히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물을 과소비하게 되는 고추를 식수난에 허덕이는 서민들이 즐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왜 그 답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남아시아의 서민들에게 지천에 깔린 고추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식수가 안정적으로 제공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것이 어디 고추뿐이고, 그것이 어디 아시아의 한 지역에서만 발생하는 일이겠는가. 짧은 여정 속에서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기억이었다. &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lt;br /&gt;&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lt;FONT size=2&gt;고추가 되버린 민주주의&lt;/FONT&gt;&lt;/SPAN&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lt;br /&gt;&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한국에서 민주주의는 고춧가루가 들어간 김치만큼이나 이젠 생활화된 언어이다. 어느 누구도 민주주의를 떠나서는 자신의 정당성을 찾기가 힘들다. 그것이 법의 형태이든, 관습의 형태이든, 혹은 가치와 의식의 형태이든 간에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자기 것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외칠수록 조갈(燥渴)을 더 느끼고 해갈(解渴)을 갈망한다. 마치 고추를 먹으면 먹을수록 물을 찾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점점 민주주의는 사치스러운 향신료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적 제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을 하고, 호소를 하지만, 이제 그 저항과 호소는 오히려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하루일당보다 못한 것이 되어 버리고 있다. 생존을 위한 일상의 노동을 투쟁과 정치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혹독한 현실에서 하루 종일의 고단한 노동에 지친 사람들이 자신의 제 권리를 찾기 위해 또 다시 거리의 정치에 자신의 육체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다. 차라리 노동과 정치의 투잡(Two jobs)을 뛰는 사람이야 일자리와 삶의 공간에서 내쫓겨 일당조차 포기한 채 설움 반 분노 반으로 ‘투쟁’을 해야 하는 이들에 비하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가 ‘생명의 물’인줄 알았고, 민주주의가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라 희망을 품었던 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점차 매운 고추가 되고 있다. 그 소중했던 민주주의가 이젠 너무 힘들다. &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lt;br /&gt;&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지난 4월 말 보권선거 이후 승리로 환호한 정치세력들은 일면 황홀경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현재의 이명박 정권이라면 자다가도 이를 가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그리고 진보신당은 저마다 선거승리 이후 反이명박 전선의 중심이자 향후 대안적 집권세력이 될 수 있다는 황홀경 속에서 현재의 반민주․반서민적 장벽을 깨기 위해 ‘단결’과 ‘연대’를 말하고 있다. 자신들이 서민들의 ‘조갈’을 ‘해갈’할 수 있는, 최소한 서울시가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아리수’급 정도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자신들이 ‘타른 목마름’을 해결하는 물과 같았던 민주주의를 매운 고추로 만들어버린 ‘조갈’의 원인제공자들이라는 것은 반성하고 있지 못하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신자유주의적 결과물’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또한 2004년 국민들이 만들어준 성과를 분열로 만들어버린 것에 대해 서로를 성토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을 ‘정당’과 ‘선거’라는 향신료로 만들어버린 잘못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다. &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lt;br /&gt;&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lt;br /&gt;&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lt;FONT size=2&gt;수식어가 붙은 야3당의 역할&lt;/FONT&gt;&lt;/SPAN&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lt;br /&gt;&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당장 다음 달 6월 임시국회가 시작되면 ‘미디어법’을 둘러싸고 정국이 긴장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의 무서움은 7월부터 노동시장 대란을 불러일으킬 비정규직 악법의 개악에 숨어잇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그리고 진보신당이 국민들이 미디어법과 비정규직법 개악에 분노하여 ‘생업’을 접고 거리로 나오기를 손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국민을, 서민을, 약자를 위하는 정치세력이라면 제2의 촛불을 기다리거나 기대해서는 안된다. 국민들은 무더위를 이길 수 있는 상큼한 일자리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시원한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그들을 지지한 것이고, 지난 보궐선거의 결과를 만들어 준 것이다. 국민들은 이미 삶의 현장에서 온 몸으로 현 정권에 대한 비판과 분노를 보여주고 있다. 현 정권에 대한 비판과 분노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 야3당(여기서 친박연대와 창조한국당을 굳이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이 굳이 할 일이 아니다. 야3당은 국민들이 거리투쟁이 아니라 다가오는 여름부터 일자리와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도록 지금부터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lt;br /&gt;&lt;/FONT&gt;&lt;/P&gt;
&lt;P class=EC_HStyle0&gt;&lt;FONT size=2&gt;‘민주’, ‘노동’, ‘진보’라는 수식어가 붙은 야3당은 새로운 연대의 전형을 만들어 민주주의를 조갈(燥渴)의 향신료가 아닌 해갈(解渴)의 식수(食水)로 다시 바꿔야 한다. 자신들의 게으름 혹은 차이로 인해 그 전형과 변화가 실패한다면, 결과는 생각보다 무섭다. 청계천과 ‘아리수’ 이상으로 4대강 정비사업은 국민들에게 해갈을 가장한 독수(毒水)로 퍼질 것이다. 국민들은 독수인지 생수인지 구별할 정신이 없을 정도로 삶이 힘들고 목이 타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연대의 전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해갈을 위한 희망의 시작일 것이다. &lt;/FONT&gt;&lt;/P&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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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이승원</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39</guid>
			<comments>http://jihaeng.net/blog/139#entry139comment</comments>
			<pubDate>Tue, 26 May 2009 14:36:27 +0900</pubDate>
		</item>
		<item>
			<title>4.29 재보선의 승자와 패자(이영제)</title>
			<link>http://jihaeng.net/blog/138</link>
			<description>&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5pt; LINE-HEIGHT: 160%&quot;&gt;4·29 재보선의 승자와 패자&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이 영 제(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gt;&amp;nbsp;이명박 정권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유권자들이 4·29 재·보궐 선거에서 “총탄대신 투표로” 5대0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언론과 정치권에서 한나라당의 참패로 평가하고 있는 이번 선거의 결과가 경제부흥에 열광했던 이명박 대통령 지지자들의 이탈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지난 대선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해 무당파를 형성했던 유권자들이 투표소로 복귀한 것인지를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gt;&amp;nbsp;‘5대0’이라는 명확한 결과와 다르게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주의 2개 선거구는 애초부터 한나라당과 관계없는 지역정당의 집안싸움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고 경주에서의 선거도 소위 ‘친이’와 ‘친박’이라는 한 지붕 두 가족의 자존심 싸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현 정권 또는 집권 여당에 대한 평가와는 거리가 있는 3곳을 제외하면, 이번 선거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부평과 울산 2곳에 불과하다.&lt;/P&gt;
&lt;br /&gt;
&lt;P class=HStyle0&gt;&amp;nbsp;진보정치 1번지로 불렸던 울산에서는 ‘분열 당한 민주노동당’과 ‘분화한 진보신당’의 후보단일화를 둘러싼 치열한 샅바싸움과 진보정당과 보수정당간이 경쟁이라는 두 개의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예선에서 조승수 전의원과 진보신당을 심판하는데 모든 자원을 동원했다. 분열은 잘못이며, 다시 통합을 하기 위해 민주노동당 후보가 단일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진보신당은 원외전당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돌파구로써 조승수 전 의원의 당선을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특히 민주노동당에게 분열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조승수 전 의원은 진보신당에게는 분화의 상징적 존재라는 점에서 후보 단일화 과정은 보수정당과의 경쟁보다 치열했다. 선거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아쉽게도 양자의 승부는 뒤로 미루어 졌다. 결과적으로 진보신당은 원내 진출에 성공함으로써 진보정당 원내진출 5년 만에 복수 진보정당 시대를 열었다.&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gt;&amp;nbsp;울산에서의 승리로 유일 진보정당으로서의 위상을 찾고자 했던 기획은 실패했지만 민주노동당은 호남에서 울산에서의 승리 이상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민주당 텃밭인 호남에서 민주당을 여유있게 누르고 광역의원과 기초의원이 당선된 것이다. 호남에서의 지속적인 선전은 민주당을 대체할 ‘대안 정치세력’으로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을 확보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가장 뼈아픈 패배를 경험한 것은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다.&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gt;&amp;nbsp;민주당은 5곳의 선거구 중 부평 1곳에서만 자당의 후보를 당선시켰다. 문제는 친MB후보로도 손색이 없는 FTA의 첨병을 소위 ‘반MB 후보’로 공천함으로써 국민들의 현 정권에 대한 비판적 정서를 희화화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반MB연대’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민주노동당이 가장 중요한 선거구로 꼽혔던 부평에서 단일화를 거부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반MB연대’의 최대 수혜자로서 민주당의 위상을 스스로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민주당에게 보다 뼈아픈 것은 호남이라는 텃밭에서 진행된 광역의원선거와 기초의원선거에서 민주노동당에게 패했다는 것이다. 호남에서의 민주당에 대한 지지철회가 민주노동당 및 무소속의 선전으로 외화 되고 있는 것이다.&lt;/P&gt;
&lt;P class=HStyle0&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gt;&amp;nbsp;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특이한 것은 향후 선거까지를 관통하는 큰 흐름을 형성하려 했던 소위 ‘반MB 연대’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과 같이 야권과 시민사회진영이 일찌감치 추진해 온 ‘반 MB연대’는 이번 재보궐 선거에 어떠한 성과도 내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체조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부평에서 전 한미FTA국내대책본부장을 지낸 후보가 민주당에서 공천되었고, 울산에서는 ‘분열당한 민노당’과 ‘분화한 진보신당’의 샅바싸움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MB 진영’에서 이와 관련된 제대로 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반MB연대를 추진했던 세력들의 ‘이율배반적’ 침묵과 소극적 대응은 비판적 지지의 연장선에 있는 ‘반MB연대’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lt;/P&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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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이영재 \</category>
			<category>재보선</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38</guid>
			<comments>http://jihaeng.net/blog/138#entry138comment</comments>
			<pubDate>Mon, 11 May 2009 13:27:37 +0900</pubDate>
		</item>
		<item>
			<title>민심을 거역하는 정부(하승우)</title>
			<link>http://jihaeng.net/blog/137</link>
			<description>&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민심을 거역하는 정부&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 TEXT-ALIGN: righ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하승우(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얼마 전 재보궐 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예상대로 한나라당의 패배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1명, 진보신당 1명, 무소속 후보 3명이 당선되었고, 경기도 시흥시장도 민주당 후보가 차지했다. 시도의원 선거에서도 서울시 광진구에서 한나라당 후보 1명이 시의원으로 당선된 것을 제외하면 강원도에서 무소속 후보가, 전라남도에서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구시군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1석도 얻지 못했고 민주당이 2석, 민주노동당이 1석, 무소속이 2석을 차지했다. &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그 전에 치러진 경기도 교육감 선거까지 고려한다면 집권 여당의 완전한 패배라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약 1년이 지난 뒤에 치러졌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그동안의 정부정책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거 결과만 보면 민심은 이명박 정부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그 점은 계속 떨어지던 투표율이 올라갔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왜 투표에 환멸을 느끼던 유권자들이 의식적으로 투표소를 찾았을까? 투표에 참가하지 않으면 이미 조직화된 표를 가진 여당 후보가 당선될 터이니, 이를 막기 위해 유권자들이 의식적으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을까?&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어쨌거나 정치에 대한 환멸이 참여의 관심으로 변한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된 걸까? 한나라당이 참패를 했으니 정치의 희망이 생긴 걸까?&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작년 초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난 뒤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촛불의 실패 또는 패배’를 얘기했다. 제도정치로 이어지지 못하는 촛불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왔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과 촛불의 목소리가 선거로 이어졌으니 이제 진보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걸까?&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오히려 선거 이후 이명박 정부는 지난 노동절 집회와 촛불 1주년 기념집회를 무참히 짓밟았다.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221명이 연행되었고, 용산철거민대책회의가 용산에 설치했던 천막도 기습 철거되었다. 선거결과로 드러난 민심에도 이명박 정부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더욱더 철저히 탄압하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지난 5월 2일 법무부와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 장관이 발표한 대국민담화문은 그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 푼의 관광수입도 아쉬운 때입니다.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실낱같으나마 도처에서 경제의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때 폭력시위로 국력을 낭비할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우리는 지난해 무분별한 시위로 많은 국력을 낭비했습니다. 값비싼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올해에도 이러한 상황이 재발된다면 정부는 부득이 법에 따라 단호히 조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한 푼의 관광수입도 아쉬우니 시위를 벌이지 말라는 논리가 참으로 터무니없지만, 실제로 연행된 사람들은 48시간을 꼬박 갇혀 있다 석방되었으니 단호한 법의 집행이라 하겠다. 앞으로 정부는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를,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민심을 폭력이라 규정하고 탄압하려 들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는 지역토호의 중심세력인 새마을운동중앙회와 한국자유총연맹과 손을 잡고 ‘3대 신국민운동’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 정부는 민심을 따르기는커녕 자신이 민심을 만들고 조작하겠다는 강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이 점은 과거와 달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대국민담화문에 동참했다는 점에서도 그러난다. 왜냐하면 개정될 통신비밀보호법이나 저작권법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사이버 법치주의’를 실현하고 ‘사이버 민심’을 조작할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따라서 이명박 정부와 기득권층은 아예 민심이 형성될 수 있는 장을 없애고 과거처럼 순종하는 국민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미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 및 시위의 자유 등 시민의 온갖 기본권이 위협을 받고 있으니, 이런 흐름은 단지 가능성으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그런데 우리의 비극은 민심을 거역하는 정부가 이명박 정부만의 특징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권력을 장악한 정부는 언제나 민심을 거역하고 민심을 억누르고 조작해 왔다. 그리고 좌/우를 떠나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그런 과정에 동참하며 이득을 누려왔다. 언제나 민심은 민중의 가슴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통계수치나 지식인들의 전문용어, 정치인들의 공약(空約)으로만 드러나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과거의 정부보다 조금 더 노골적일 뿐이다.&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더구나 이명박 정부에서 권력을 쥔 자들은 이런 흐름을 계속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재보궐 선거에서 몇 번을 패배해도 3년 반 뒤의 대통령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이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보다 박근혜라는 보수정치인에 대한 지지로 전환되리라 예상하고 있다. 즉 한국의 기득권층은 대표선수만 바꾸면 이권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니 민심 따위가 어찌 무섭겠는가?&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휴먼명조&#039;&quot;&gt;그렇다면 한국의 진보는 이런 분위기를 바꾸고 자신이 그토록 강조하는 민중의 가슴에서 민심을 끌어낼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을까? 촛불 1주년을 기념하는 많은 자리에서도 나는 그런 대안들을 잘 찾을 수 없었다. 진보의 위기는 바로 그 점에 있고, 그런 점에서 위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lt;/SPAN&gt;&lt;/P&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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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하승우</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37</guid>
			<comments>http://jihaeng.net/blog/137#entry137comment</comments>
			<pubDate>Wed, 06 May 2009 14:39:16 +0900</pubDate>
		</item>
		<item>
			<title>&#039;광명성 2호&#039; 발사가 북한사회에서 의미하는 것들[오창은]</title>
			<link>http://jihaeng.net/blog/136</link>
			<description>&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6pt; LINE-HEIGHT: 160%&quot;&gt;‘광명성 2호’ 발사가 북한사회에서 의미하는 것들&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5pt; LINE-HEIGHT: 160%&quot;&gt;- 북한 문학을 통해 읽은 북한사회의 최근 동향&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 TEXT-ALIGN: right&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 TEXT-ALIGN: right&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오창은(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토끼연구소’에 쏟아 부은 열정&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북한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은 한 여인의 회상에서 시작된다. 이 여인(미연)은 셋째 아들을 과학자로 키워냈다. 아들은 자신만만한 패기로 넘쳐나고,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미연은 이를 대견해 하면서도, ‘은근한 불안감’을 느끼곤 한다. 그 불안감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소설은 바로 이 부분에서 리준성에 대한 미연의 회고가 겹쳐진다. 리준성과 정미연은 대학 학과경연대회에서 나란히 1등을 한 사이였다. 특히, 준성은 ‘현미경연구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희망과 정열’이 넘쳐 있었다. 그런데, 촉망받던 준성이 갑자기 연구소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지방에 있는 ‘토끼연구소’에서 새로운 연구에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미연은 ‘이미 토대를 닦은 이곳을 떠나 새 출발 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라며 만류한다. 이 부분에서 북한사회에서도 ‘평양’의 특권적 지위가 얼마나 강한가를 확인할 수 있다. 젊은 세대는 가급적 평양에 남으려고 하고, 지방으로 가면 주류에서 밀린다는 강한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하지만, 준성은 막무가내로 지방에 있는 ‘토끼연구소’로 떠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아직 가정이 없고 이곳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은 내가 가는게 제일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더불어 준성은 “나야 아직 연구분야를 바꾸어도 다시 내달릴 여유가 있지만 나이 많은 연구사들에겐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고려도 포함된다. 일종의 자기 희생이 준성에게 그런 선택을 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준성은 지방의 이름 없는 연구사로 연구에 몰두하러 떠난다. 3년후, 미연이 준성을 다시 만난 것은 내각에서 소집한 ‘긴급협의회’에서였다. ‘××닭공장에서 터진 《ㄱ》전염병’으로 인해 속수무책일 때, 준성이 또 다시 결단성을 보인다. 그는 ‘비록 토끼와 말 밖에 다루어보지 못했’지만, “배워서라도 예방약을 만들겠다”고 주장해 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준성의 연구는 성공했고 닭 전염병도 씻은 듯이 나았다. 그 준성이 바로 과학자로 성공한 셋째 아들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미연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힌다. &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이 소설은 《조선문학》 2008년 8월호에 실린 배경휘의 「세월의 물음 앞에」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셋째 아들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시작되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준성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히는 기법을 활용했다. 이 소설은 지금의 북한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현실과 열망’을 확인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될 수 있을 듯하다. &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강성대국건설과 광명성 2호&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1998년 8월 22일자 《로동신문》에 정론 「강성대국」에 관한 글이 실리면서, 북한문학은 ‘과학(환상)소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른바 ‘강성대국건설’과 ‘과학소설’의 비중 강화는 북한사회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4월 5일 발사한 로켓(은하-2호)와 인공위성(광명성 2호)은 북한사회의 ‘일대 사건’일 수밖에 없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쳐 인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주창해온 ‘강성대국건설’이 인공위성을 통해 그 열매를 맺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남한을 포함한 주변국에서는 그 의미를 폄하하기에 여념이 없다. 4월 5일, 실제로 발사가 이뤄지기 전까지 인공위성 발사를 미사일 발사로 지칭했다. 어떤 의미에서 로켓과 인공위성 발사는 북한정권의 이중적인 포석이었다.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과학적 성과를 증명하는 것, 이를 통해 북한 체제의 실제적 힘을 과시하는 것이 목표였다. &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북한은 &amp;lt;로동신문&amp;gt; 2009년 4월 6일자 1면 사설을 통해 ‘강성대국건설에서 승리의 첫 포성을 울린 위대한 력사적 사변’으로 인공 위성 발사에 의미부여를 했다. 4월 9일자 &amp;lt;로동신문&amp;gt;을 통해서는 ‘인공지구위성 광명성2호의 성과적 발사를 환영하는 평양시군중대회가 10만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8일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되었다’고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4월 17일에는 평안남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강원도, 함경북도, 량강도에서 군중대회가 개최되었고, 4월 19일에는 시, 군 단위에서 군중대회가 인공위성발사를 축하하는 군중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북한은 이번 광명성2호 인공위성 발사를 내부 결속의 중요한 계기로 삼고 있다. &amp;lt;로동신문&amp;gt; 2009년 4월 20일자 1면에 따르면, 북한은 대규모 군중집회를 통해 그간 담론으로만 존재해 왔던 ‘강성대국건설’이 ‘광명성 2호’로 실체화되었음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반면 이를 받아들이는 남한 정부의 태도는 너무 민감하고 적대적이어서 향후 남북관계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남한에서 이번 인공위성 발사를 계기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전면 참여를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은 남북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남한 정부의 입장은 북한의 ‘광명성 2호’를 인공위성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는 결국 북한을 주권국가로 대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남북관계의 긍정적 개선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북한 사회가 ‘광명성 2호’ 발사를 자축하는 축제분위기인데, 남한 사회는 전쟁이 임박한 듯한 위기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제반 분야의 협력, 교류 활성화를 통한 서로의 신뢰 회복’에 대해 그 의미를 다시 되새겼으면 한다. 현재의 북한 사회는 ‘강성대국건설’ 담론을 ‘광명성 2호’ 발사를 통해 실체화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남한에서 나서서 이를 남북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사건으로 만들고 있어 우려스럽다. 실제로 북한은 남한의 PSI 전면 참여에 대해 ‘노골적인 대결포고, 선전포고’라고 반발하고 있다. &amp;lt;민주조선&amp;gt; 2009년 4월 19일자 3면에 따르면, 북한은 남한의 PSI 전면 참여 논의가 ‘6자회담 합의에 구속되지 않고 핵억제력을 포함한 방위력 강화’로 이어졌다고 공식 발표했다. 특히, 북한 군부의 반응이 강경하다는 사실에 대해 유념할 필요가 있다. 군사대결의 예각화는 또 다른 파국에 대한 전조로 읽힐 수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이나 ‘6자 회담’이 지향하는 바도 군사대결을 피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6자회담은 지속될 필요가 있으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노력도 남북이 함께 지속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amp;nbsp; &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혁명적 낭만주의에 비친 북한의 이면&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북한문학은 북한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북한문학을 읽으면서, 이번 은하-2호 로켓 발사와 광명성 2호 인공위성 발사의 의미를 반추하는 과정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유독 1990년대 후반, 즉 ‘고난의 행군’ 이후에 북한문학에서 ‘과학(환상)소설’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사실이 눈에 띤다. 북한문학에서 ‘과학(환상)소설’은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자연을 정복해나가는 인간들의 활동과 투쟁을 환상적 형식으로 보여주는 작품을 지칭한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도전을 통해, 인간이 자연과 사회의 ‘주체적 존재’임을 내세우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그렇다면, 좀더 적극적으로 북한문학에 나타나는 ‘과학(환상)소설’의 의미를 파악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앞에서 제시한 「세월의 물음 앞에」에서 핵심적 사건은 준성이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ㄱ》 전염병’을 퇴치한 것이다. 이는 ‘과학(환상)소설’의 한 특징인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목할 부분은 이러한 ‘과학(환상)소설’에는 혁명적 낭만주의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준성이 한직이나 마찬가지인 지방의 ‘토끼연구소’로 자진해 가는 것이나, 토끼와 말밖에 다루어보지 못한 그가 ‘닭 전염병’ 퇴치를 이뤄낸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과연 세상 일이 인간의 의지, 즉 혁명적 열정만으로도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혁명적 낭만주의는 현실적 상황을 간과해 객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있는 주체의 고통을 강요하기도 한다. 주체에게 인간의 의지만을 최우선적인 것으로 제시했을 때, 그 주체는 ‘항상 자신의 의지 결여’를 탓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 낭만주의는 밝은 미래를 예언한다기 보다는, 북한 사회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지를 증언한다. 더불어 셋째 아들에 대한 미연의 불안감, 혹은 못미더움이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북한 사회에 내재해 있는 세대 간의 차이에 대한 기성 세대의 우려를 반영한다.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우려를 갖기 마련이다. 북한 사회도 마찬가지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이처럼 북한 사회가 객관적 현실 보다는 주체적 의지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했을 때, 새로운 세대에 대해 갖는 불안의식은 막연한 것이기 보다는 실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혁명 1세대와 2세대의 자발적 자기희생에 비해, 제3세대는 ‘과학적 성과’를 산출해도 ‘못 미더운 구석’을 내비치기 마련이다. 이는 북한 사회의 혁명적 기풍에 기반한 운영원리가 연속성을 갖고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고 있는가와 관련된 우려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작가는 소설의 제목처럼 ‘세월의 물음 앞에’서 어떤 답변을 내려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 고민의 해결책은 ‘과거의 혁명적 전통(준성의 모범)’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것이고, 그 전통을 현재의 삶의 지표로 삼는 것이다. &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북한문학을 금지하는 사회&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lt;br /&gt;&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이렇듯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북한사회에 대한 운영의 메커니즘을 읽어낼 수 있다. 이는 문학이 북한의 문화예술분야에 차지하는 우월적 지위 때문이기도 하고, 문학과 당의 관계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한문학을 보다 다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용적 맥락 뿐만 아니라, 문학형식의 변화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이번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북한 사회에서 어떻게 의미화 되고 있는가도, 북한 문학 작품 읽기를 통해 보다 내밀하게 읽어낼 수 있다. ‘광명성 2호’는 ‘강성대국건설’이 구체적 성과로 선포됨으로써, 북한 사회는 현재 축제분위기에 젖어있다.&amp;nbsp; &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그런데, 최근 북한문학 연구나 출판에 대한 정부의 제재가 더 심해진 듯하다. 북한 문학을 통해 북한사회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점차 봉쇄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다. 남북 문학인들이 함께 발간하는 《통일문학》은 검열로 만신창이가 된 이후에야 남쪽으로의 반입이 허용되고 있다. 『개마고원』이 아무 제재 없이 남한에서 출간될 수 있는 것, 《통일문학》이 아무 검열 없이 남한에 반입될 수 있는 것, 그것이 그리 힘든 일일까. &lt;/P&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INDENT: 12pt&quot;&gt;나는 북한 체제를 찬양하기 위해 북한문학을 읽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북한문학’을 읽는다는 것만으로 남한체제에 반대하는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분단시대 남북문학을 아우르려는 한 문학평론가를 옥죄고 있다. 그래도 나는 광화문 우체국 6층의 ‘통일원 자료센터’를 들락거린다. 그리고 북한의 문예지 《조선문학》을 읽는다. &lt;/P&gt;
&lt;P class=HStyle0&gt;&lt;SPAN style=&quot;FONT-FAMILY: &#039;한컴바탕&#039;&quot;&gt;&lt;br /&gt;&lt;/SPAN&gt;&lt;/P&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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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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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30 Apr 2009 11:44:2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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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재보선과 적전분열(이명원)</title>
			<link>http://jihaeng.net/blog/135</link>
			<description>&lt;DIV class=HM_MAILCONTENT&gt;
&lt;DIV&gt;&lt;FONT face=&quot;굴림, gulim, sans-serif&quot; color=#0000ff size=4&gt;
&lt;DIV&gt;&lt;STRONG&gt;&lt;FONT color=#3333ff&gt;안녕하세요.&lt;/FONT&gt;&lt;/STRONG&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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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STRONG&gt;&lt;FONT color=#3333ff&gt;대안지식연구회 입니다.&lt;/FONT&gt;&lt;/STRONG&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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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STRONG&gt;&lt;FONT color=#3333ff&gt;2008년 한해 동안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저희의 부족한 정치사회비평 컬럼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다시 감사드립니다.&lt;/FONT&gt;&lt;/STRONG&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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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STRONG&gt;&lt;FONT color=#3333ff&gt;사전에 알려드렸오야 하오나, 2009년 초반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들의 여러 개인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 하게 &amp;lt;정치사회비평&amp;gt; &#039; 컬럼이 석달간 중지되었습니다. 부득이하게 컬럼을 중반하게 된 점, 다시금 사과의 말씀드립니다.&lt;/FONT&gt;&lt;/STRONG&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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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STRONG&gt;&lt;FONT color=#3333ff&gt;4월부터 대안지식연구회는 다시 한국 사회 정치와 사회 등 여러 분야에 대한 비평 작업을 개시합니다.&lt;/FONT&gt;&lt;/STRONG&gt;&lt;/DIV&gt;
&lt;DIV&gt;&lt;STRONG&gt;&lt;FONT color=#3333ff&gt;2008년에 보내주신 성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성원과 비판을 부탁드립니다.&lt;/FONT&gt;&lt;/STRONG&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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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STRONG&gt;&lt;FONT color=#3333ff&gt;좀 더 발전된 모습을 지닌 젊은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거듭나도록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리며, 인사말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lt;/FONT&gt;&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lt;/FONT&gt;&lt;/DIV&gt;
&lt;DIV&gt;&lt;FONT face=&quot;굴림, gulim, sans-serif&quot; color=#0000ff size=4&gt;* 금주 대안지식연구회 컬럼 제목은 &amp;lt;적전분열&amp;gt;입니다. 작금 보궐선거 국면에서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이 지닌 난맥상과 노동자운동의 재구성에서 닥친 딜레마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재보궐선거가 다시금 &#039;투표소&#039;에서 한 표찍기가 아닌 동시에, 새로운 사회운동의 재구성이 되기 위해 어떤 사유의 전환이 필요한지 성찰하게 해주는 글입니다. &lt;/FONT&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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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FONT face=&quot;굴림, gulim, sans-serif&quot; color=#0000ff size=4&gt;** 지난 호 컬럼(&amp;lt;유전자은행법, 디스토피아 혹은 범죄예방?&amp;gt;이 제대로 발송되지 않은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락을 주시면 다시 발송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컬럼은 지행네트워크 홈페이지(&lt;/FONT&gt;&lt;A href=&quot;http://jihaeng.net/blog/&quot; target=_blank rel=nofollow&gt;&lt;FONT face=&quot;굴림, gulim, sans-serif&quot; color=#0000ff size=4&gt;http://jihaeng.net/blog/&lt;/FONT&gt;&lt;/A&gt;&lt;FONT face=&quot;굴림, gulim, sans-serif&quot; color=#0000ff size=4&gt;)에 게재됩니다.&lt;br /&gt;&lt;/FONT&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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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HStyle0&gt;&lt;SPAN&gt;&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5pt; LINE-HEIGHT: 160%&quot;&gt;&lt;FONT color=#000000 size=4&gt;재보선과 적전 분열&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br /&gt;&lt;/SPAN&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br /&gt;&lt;/SPAN&gt;
&lt;P class=HStyle0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4&gt;&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lt;FONT size=3&gt;이명원(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문학평론가)&lt;/FONT&gt;&lt;/FONT&gt;&lt;/SPAN&gt;&lt;FONT size=3&gt; &lt;/FON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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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2009년 4.29 재보선이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 선거의 프레임은 MB통치 1년에 대한 심판론의 성격을 띠고 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지난 서울교육감 선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치러진 경기교육감 선거에서의 김상곤 후보의 당선은 투표율이야 어쨌거나 반(反) MB 정서가 물밑에서 얼마만한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실감케 했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선거와 관련한 언론보도를 보면, 부평을 선거구에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초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고, 울산북 선거구에서는 후보단일화만 된다면 진보정당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전주 덕진은 탈당한 정동영 후보와 민주당의 김근식 후보가 경합하고 있지만, 누가되든 반(反)MB 세력의 당선은 당연한 결과다. 한나라당의 텃밭인 경주 역시 반(反)MB 정서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른바 ‘친이’와 ‘친박’의 세력다툼은 한 지붕 두 가족인 한나라당의 향후 역학관계를 가늠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이렇게 보면, 이번 선거에 임하는 모든 정치세력은 보수․개혁․진보 세력 모두가 반(反)MB 프레임 안에서 선거의 당락을 결정짓게 되는 셈이다. 현정부 들어 국회는 사실상 여야를 막론하고 행정부의 거수기 역할로 전락했고, 민의는 거듭 모욕당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여야를 막론하고 반(反)MB 세력의 선전은 그래서 기대해 볼 만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그러나 이른바 개혁․진보세력의 선전을 기대하면서도, 그것이 흔쾌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개혁세력의 경우, 정동영 후보의 공천 문제를 둘러싸고 민주당은 커다란 내분에 휩싸였다. 선거 결과에 따라 후폭풍은 당연히 뒤따를 것이다. 정동영 공천 문제는 민주당의 대안정당으로서의 경륜을 시험할 수 있는 장이었다. 공천문제를 어떻게 매끄럽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민주당이 진짜 개혁세력인지 아니면 한나라당과 별다를 것 없는 지역정당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었다. 물론 결론은 명백한 지역정당으로 귀결되었다. 그 책임은 물론 당지도부와 정동영 후보 모두가 짊어져야 할 정치적 책임이다. 나는 당지도부가 전주 덕진 지역에 정동영 후보를 절대 공천할 수 없다고 나선 것은 정치적 패착이었다고 본다. 그가 당의 대선후보였고 서울의 지역구에 출마했다 낙선한 ‘전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의 정치적 고향에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개인적 권력욕’ 수준으로 폄하하는 것은 사려 깊은 태도가 아니다. 동시에 민주당이 전략공천 한 김근식 후보가 과연 이 지역구와 어떤 연계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정동영 후보 역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탈당을 불사하고 무소속연합을 구성하는 등의 정략적 발상으로 의회에 입성한 뒤, 결국 민주당으로 귀환하겠다는 정후보의 공언은, 공천에 실패한 뒤 ‘친박연대’라는 기묘한 그룹을 만들어 의회에 입성한 구(舊) 한나라당 정치인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당내 계파갈등의 노골적 표출에 불과할 뿐이다. 설사 그가 당선된다고 할지라도, 정치적 경륜과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론은 그의 정치인생 후반부를 계속 따라다닐 것이고, 그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큰 꿈’의 진정성을 회의하게 만드는 부정적 ‘낙인’을 더욱 선명하게 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만일 정후보가 낙선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의 정치인생은 여기가 ‘끝’이다. 정후보 역시 정치적 패착을 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이 시점에서 와신상담하고 있는 손학규 전 대표의 정중동의 움직임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울산 북구에서의 진보양당의 경합 역시 실망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이 지역의 국회의원이었던 조승수 후보에 대한 현지의 지지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선거법 위반으로 그가 낙선하지 않고 울산 북구에서의 의정활동을 지속했다면, 세력이 미미한 사회당을 제외하고 유일 원내 진보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기반은 민주당의 패착 때문에라도, 대안정당으로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 더 넓게 열렸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을 분열시킨 ‘원죄’에 대한 대중적 추궁으로부터 그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자신의 선의야 어떻든 민주노동당을 마치 ‘종북세력’의 집결지인 것처럼 비난하면서, 양당의 분열을 촉발시켰던 당사자가 재보선 국면에서 국회의원에 발 빠르게 입후보하고 또 단일화를 요구한다는 것자체가 민주노동당 입장에서는 마뜩치 않은 사태인 것은 분명하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그렇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의 김창현 후보의 행보가 마냥 긍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정치적 야심이 있는 것이고,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가급적이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단일화의 조건을 제도화하려는 유혹을 갖고 있겠지만, 후보단일화의 셈법을 민주노총의 전략적 지지표와 연결하고자 끝까지 애쓰는 모습은 과연 그가 단일화에의 의지가 있는 것인지 회의케 하기에 충분하다. 동시에 진보정당이 양당으로 분열되었다면,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역시 상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분열될 것은 분명한 일 아닌가. 동시에 울산북구 지역이 노동자의 도시라고 해서, 과연 이 지역의 민심을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대표할 수 있느냐는 원리적인 의문도 당연히 제시된다. 지역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과 노동자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범주가 다른 문제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결국 진보양당의 후보 역시 전주 덕진에서의 정동영․김근식 후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욕망만을 내세우다가, 후보등록 전 단일화는 고사하고 선거직전까지 서로를 비난하다가 결국 단일화에 실패해 정치적 냉소를 초래하거나, 단일화를 통해 당선된다고 해도 ‘상처뿐인 영광’으로 진보정치에 대한 희망을 거두게 만들지 않을까 진심으로 우려된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물론 정치행위는 ‘최선’을 추구해야 하되, 실제로는 ‘실현가능한 최선’의 한계 안에서 결정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혁세력을 자처하건 진보세력을 대표하건 간에, 오늘의 정치지형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반(反)MB 전략 빼고는 미래전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우려스럽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돌이켜 보면 소수야당인 민주당은 선거 패배 이후 야성(野性)을 강화시켜 확고한 개혁세력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해왔다기보다는 ‘촛불정국’에 기대어 내부개혁과 미래전망에 대한 체계적인 설계를 방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보양당 역시 ‘촛불정국’에서 자못 치열한 장외투쟁을 벌인 것은 인정하겠지만, 변화된 정치적 환경 속에서 과연 정국운영의 아젠다는 고사하고, 진보정치의 미래전략을 얼마나 가다듬고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 대단히 회의적이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사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진보․개혁 세력 전체의 위기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민들의 반MB정서가 높다는 사실이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목표를 지체시킬 수 있는 원인일 수는 없다. 최근의 민주노총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위기는 제대로 된 ‘진보의 재구성’이 없다면, 마치 대처시대의 영국과 같이 보수세력의 장기집권으로 한국정치가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를 현실화시킬 확률이 높다. 이른바 반(反)MB 정서의 고양이 개혁․진보 새력의 입지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키기보다는 ‘보수혁명’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오히려 촉발시켜, 한국판 대처 이미지로 무장할 것이 분명한 ‘박근혜 체제’로 귀결될 확률이 오히려 높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어떤 점에서 보면, 오늘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양립은 영국의 노동당 세력이 노동당과 사민당의 양당체제로 분열된 후, 사민당은 정치적으로 사멸하고 노동당조차 신자유주의의 거센 흐름 속으로 타협해 들어간 영국 진보정당 운동의 역사를 회상하게 만드는 측면도 없지 않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그래서 이 부분에서 우리가 한번쯤 진지하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진보양당이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노동자 중심성’이라는 테제가 과연 오늘의 현실에서도 유효한 진단인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사실 오늘의 민주노총의 위기를 포함하여,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는 개혁․진보세력에 동의하는 유권자들이 선거 국면에서 보수정당에 지지표를 던지는 아이러니는 이면의 더 강력한 현실적 계급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1990년대 이후 일반화된 ‘투자자’라는 정체성이 그것인데, 1960년대 영국 노동당의 선거에서의 패배를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이 ‘투자자’ 정체성에서 찾았고, 1980년대 대처리즘의 확산의 원인을 검토했던 스튜어트 홀이 지적했던 것 역시 노동자들의 ‘투자자’ 정체성으로의 ‘변형’이었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2009년 현재 한국의 노동자 전체가 이 ‘투자자’ 정체성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극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하고 정치적으로는 진보․개혁 세력임을 스스로 공언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나날이 변화하는 증권시황판에 눈길을 던지면서, 자신이 투자한 펀드와 부동산의 등락에 예민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우리는 의지적으로 부정하지 말고 비관적으로 직시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노동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진보적 노동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른바 ‘강부자’에 속한 계층이 열렬한 ‘강남좌파’로 변신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 자신이 처해 있는 변화하고 있는 물적 토대의 변화는 동시에 그의 정치적 의식 역시 유동적으로 만들며, 정체성이란 그렇게 역사적 환경변화 속에서 수시로 출렁거리는 액체성에 가까운 것이다.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때문에 오늘의 진보․개혁세력들이 고민해야 될 문제는 이것이다. 평소에는 정치적으로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견해를 표출하고 있던 사람들이 왜 지난 대선국면에서 MB를 지지했는가. 금융자본주의의 세계화에 따라, 그것에 연결된 노동자 정체성과 이데올로기 역시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lt;SPAN&gt;&lt;FONT color=#000000 size=3&gt;&amp;nbsp;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이 이러한 계급 정체성의 문제나 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한 고민을 성숙하게 전개시키면서, 새로운 리더십의 모델 및 정치적 아젠다를 창출하는 노력을 치밀하게 진행시키지 않는다면, 임박한 재보선의 결과와 무관하게 진보개혁 세력의 정치적 전망은 장기적으로 보자면 어두울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진보의 재구성’이 말이 아닌 실천으로 나타나야 할 때가 지금이다. 그러니 재보선 정국에서의 적전분열 양상이 내게는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amp;nbsp; &lt;/FONT&gt;&lt;/SPAN&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SPAN&gt;&lt;FONT color=#000000&gt;&amp;nbsp; &amp;nbsp; &amp;nbsp; &lt;/FONT&gt;&lt;/SPAN&gt;&lt;BR clear=all&gt;&lt;/FONT&gt;&lt;/P&gt;&lt;br /&gt;-- &lt;br /&gt;대안지식연구회 &lt;br /&gt;정치사회비평 컬럼은 아래 지행네트워크 홈페이지에 링크됩니다(&lt;A href=&quot;http://jihaeng.net/blog&quot;&gt;http://jihaeng.net/blog&lt;/A&gt;).&lt;br /&gt;&lt;br /&gt;※ 편지내용이 잘 안보이시면 &#039;원문보기&#039;를 눌러서 보시기 바랍니다. 브라우저에서 해당 언어의 인코딩을 지원해야 합니다.&lt;br /&gt;&lt;br /&gt;&lt;A href=&quot;http://wwl389.hanmail.net/Mail-bin/view_submsg.cgi?TM=jOi5o%2BGuQw0MlxLT47MRUTJBiYTHJ2YQcwJj4q%2Fe44lC%2F78ISPWFlFgzOW4L1NPM2LnJJLKlviOX3trtBtobaheHjROAkC4ndUbsSSXrUuOkUdsnOuKS7UNyg%2FPd0nQs1v6o1wRwMWCNdjsCxxYN8AGl5cogTbDxlQPhNTCTnq0frywrgXqxDOLyrAXsT8xyw1ZETJ2muQEfS20D7ZiWOLSSrmZxq9cisdfN2cZ9h1DIocKJYOgral2rsyokW%2FGL7a%2FuId1Jp7Eo5izIMP35m54a%2F3YSGXKywq8yH5%2FqkOv367oJp%2Fsi0D6JiugrVL8L%2BTGOlc10lDoSqmk0qifyEVHuIOsW7o1qc22Vt5AHUgIxDCTSOX2626F96%2BAJDocTS2UtIhQVTmyyxqlNdfmS2A5h3IKPuh19qcVrniagaJku1WjU1ek3oGiUhLx1tsyEsP5OGDXlLcfBp9IrZCbCm8BlT7%2BD6nRz3uwkU4LIx%2FqZc3QtQi6bvdeP5STmAdNdWARdL94T2%2BPD%2FYSq45IMI4xZFLwnkGYSfCTXr54bpc38OSfFXrfNSsYdr7lZ1TuY&amp;amp;MSGID=z000000000J9kNp&amp;amp;pos=23798&amp;amp;bodylen=25562&amp;amp;type=foreign&quot;&gt;원문보기&lt;/A&gt;&lt;br /&gt;언어종류: UTF-8&lt;br /&gt;Content-Type: text/html &lt;TEXTAREA id=RE_CONTENT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lt;div&amp;gt;&amp;lt;font face=&quot;굴림, gulim, sans-serif&quot; color=&quot;#0000ff&quot; size=&quot;4&quot;&amp;gt;
&amp;lt;div&amp;gt;&amp;lt;strong&amp;gt;&amp;lt;font color=&quot;#3333ff&quot;&amp;gt;안녕하세요.&amp;lt;/font&amp;gt;&amp;lt;/strong&amp;gt;&amp;lt;/div&am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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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amp;gt;&amp;lt;strong&amp;gt;&amp;lt;font color=&quot;#3333ff&quot;&amp;gt;2008년 한해 동안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저희의 부족한 정치사회비평 컬럼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다시 감사드립니다.&amp;lt;/font&amp;gt;&amp;lt;/strong&amp;gt;&amp;lt;/div&am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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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amp;gt;&amp;lt;strong&amp;gt;&amp;lt;font color=&quot;#3333ff&quot;&amp;gt;사전에 알려드렸오야 하오나, 2009년 초반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들의 여러 개인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 하게 &amp;amp;lt;정치사회비평&amp;amp;gt; &#039; 컬럼이 석달간 중지되었습니다. 부득이하게 컬럼을 중반하게 된 점, 다시금 사과의 말씀드립니다.&amp;lt;/font&amp;gt;&amp;lt;/strong&amp;gt;&amp;lt;/div&am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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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amp;gt;&amp;lt;strong&amp;gt;&amp;lt;font color=&quot;#3333ff&quot;&amp;gt;2008년에 보내주신 성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성원과 비판을 부탁드립니다.&amp;lt;/font&amp;gt;&amp;lt;/strong&amp;gt;&amp;lt;/div&am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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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amp;gt;&amp;lt;strong&amp;gt;&amp;lt;font color=&quot;#3333ff&quot;&amp;gt;좀 더 발전된 모습을 지닌 젊은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거듭나도록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리며, 인사말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amp;lt;/font&amp;gt;&amp;lt;/strong&amp;gt;&amp;lt;/div&amp;gt;
&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font&amp;gt;&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font face=&quot;굴림, gulim, sans-serif&quot; color=&quot;#0000ff&quot; size=&quot;4&quot;&amp;gt;* 금주 대안지식연구회 컬럼 제목은 &amp;amp;lt;적전분열&amp;amp;gt;입니다. 작금 보궐선거 국면에서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이 지닌 난맥상과 노동자운동의 재구성에서 닥친 딜레마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재보궐선거가 다시금 &#039;투표소&#039;에서 한 표찍기가 아닌 동시에, 새로운 사회운동의 재구성이 되기 위해 어떤 사유의 전환이 필요한지 성찰하게 해주는 글입니다. &amp;lt;/font&amp;gt;&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font face=&quot;굴림, gulim, sans-serif&quot; color=&quot;#0000ff&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 &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font face=&quot;굴림, gulim, sans-serif&quot; color=&quot;#0000ff&quot; size=&quot;4&quot;&amp;gt;** 지난 호 컬럼(&amp;amp;lt;유전자은행법, 디스토피아 혹은 범죄예방?&amp;amp;gt;이 제대로 발송되지 않은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락을 주시면 다시 발송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컬럼은 지행네트워크 홈페이지(&amp;lt;/font&amp;gt;&amp;lt;a href=&quot;http://jihaeng.net/blog/&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follow&quot;&amp;gt;&amp;lt;font face=&quot;굴림, gulim, sans-serif&quot; color=&quot;#0000ff&quot; size=&quot;4&quot;&amp;gt;http://jihaeng.net/blog/&amp;lt;/font&amp;gt;&amp;lt;/a&amp;gt;&amp;lt;font face=&quot;굴림, gulim, sans-serif&quot; color=&quot;#0000ff&quot; size=&quot;4&quot;&amp;gt;)에 게재됩니다.&amp;lt;br&amp;gt;
&amp;lt;/font&amp;gt;&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font color=&quot;#0000ff&quot;&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amp;gt; &amp;lt;/font&amp;gt;&amp;lt;/font&amp;gt;&amp;lt;/div&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lt;/span&amp;gt;&amp;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5pt; LINE-HEIGHT: 160%&quot;&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재보선과 적전 분열&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 style=&quot;TEXT-ALIGN: right&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이명원(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문학평론가)&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br&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2009년 4.29 재보선이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 선거의 프레임은 MB통치 1년에 대한 심판론의 성격을 띠고 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지난 서울교육감 선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치러진 경기교육감 선거에서의 김상곤 후보의 당선은 투표율이야 어쨌거나 반(反) MB 정서가 물밑에서 얼마만한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실감케 했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선거와 관련한 언론보도를 보면, 부평을 선거구에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초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고, 울산북 선거구에서는 후보단일화만 된다면 진보정당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전주 덕진은 탈당한 정동영 후보와 민주당의 김근식 후보가 경합하고 있지만, 누가되든 반(反)MB 세력의 당선은 당연한 결과다. 한나라당의 텃밭인 경주 역시 반(反)MB 정서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른바 ‘친이’와 ‘친박’의 세력다툼은 한 지붕 두 가족인 한나라당의 향후 역학관계를 가늠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이렇게 보면, 이번 선거에 임하는 모든 정치세력은 보수․개혁․진보 세력 모두가 반(反)MB 프레임 안에서 선거의 당락을 결정짓게 되는 셈이다. 현정부 들어 국회는 사실상 여야를 막론하고 행정부의 거수기 역할로 전락했고, 민의는 거듭 모욕당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여야를 막론하고 반(反)MB 세력의 선전은 그래서 기대해 볼 만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그러나 이른바 개혁․진보세력의 선전을 기대하면서도, 그것이 흔쾌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개혁세력의 경우, 정동영 후보의 공천 문제를 둘러싸고 민주당은 커다란 내분에 휩싸였다. 선거 결과에 따라 후폭풍은 당연히 뒤따를 것이다. 정동영 공천 문제는 민주당의 대안정당으로서의 경륜을 시험할 수 있는 장이었다. 공천문제를 어떻게 매끄럽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민주당이 진짜 개혁세력인지 아니면 한나라당과 별다를 것 없는 지역정당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었다. 물론 결론은 명백한 지역정당으로 귀결되었다. 그 책임은 물론 당지도부와 정동영 후보 모두가 짊어져야 할 정치적 책임이다. 나는 당지도부가 전주 덕진 지역에 정동영 후보를 절대 공천할 수 없다고 나선 것은 정치적 패착이었다고 본다. 그가 당의 대선후보였고 서울의 지역구에 출마했다 낙선한 ‘전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의 정치적 고향에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개인적 권력욕’ 수준으로 폄하하는 것은 사려 깊은 태도가 아니다. 동시에 민주당이 전략공천 한 김근식 후보가 과연 이 지역구와 어떤 연계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정동영 후보 역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탈당을 불사하고 무소속연합을 구성하는 등의 정략적 발상으로 의회에 입성한 뒤, 결국 민주당으로 귀환하겠다는 정후보의 공언은, 공천에 실패한 뒤 ‘친박연대’라는 기묘한 그룹을 만들어 의회에 입성한 구(舊) 한나라당 정치인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당내 계파갈등의 노골적 표출에 불과할 뿐이다. 설사 그가 당선된다고 할지라도, 정치적 경륜과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론은 그의 정치인생 후반부를 계속 따라다닐 것이고, 그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큰 꿈’의 진정성을 회의하게 만드는 부정적 ‘낙인’을 더욱 선명하게 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만일 정후보가 낙선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의 정치인생은 여기가 ‘끝’이다. 정후보 역시 정치적 패착을 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이 시점에서 와신상담하고 있는 손학규 전 대표의 정중동의 움직임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울산 북구에서의 진보양당의 경합 역시 실망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이 지역의 국회의원이었던 조승수 후보에 대한 현지의 지지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선거법 위반으로 그가 낙선하지 않고 울산 북구에서의 의정활동을 지속했다면, 세력이 미미한 사회당을 제외하고 유일 원내 진보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기반은 민주당의 패착 때문에라도, 대안정당으로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 더 넓게 열렸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을 분열시킨 ‘원죄’에 대한 대중적 추궁으로부터 그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자신의 선의야 어떻든 민주노동당을 마치 ‘종북세력’의 집결지인 것처럼 비난하면서, 양당의 분열을 촉발시켰던 당사자가 재보선 국면에서 국회의원에 발 빠르게 입후보하고 또 단일화를 요구한다는 것자체가 민주노동당 입장에서는 마뜩치 않은 사태인 것은 분명하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그렇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의 김창현 후보의 행보가 마냥 긍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정치적 야심이 있는 것이고,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가급적이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단일화의 조건을 제도화하려는 유혹을 갖고 있겠지만, 후보단일화의 셈법을 민주노총의 전략적 지지표와 연결하고자 끝까지 애쓰는 모습은 과연 그가 단일화에의 의지가 있는 것인지 회의케 하기에 충분하다. 동시에 진보정당이 양당으로 분열되었다면,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역시 상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분열될 것은 분명한 일 아닌가. 동시에 울산북구 지역이 노동자의 도시라고 해서, 과연 이 지역의 민심을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대표할 수 있느냐는 원리적인 의문도 당연히 제시된다. 지역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과 노동자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범주가 다른 문제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결국 진보양당의 후보 역시 전주 덕진에서의 정동영․김근식 후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욕망만을 내세우다가, 후보등록 전 단일화는 고사하고 선거직전까지 서로를 비난하다가 결국 단일화에 실패해 정치적 냉소를 초래하거나, 단일화를 통해 당선된다고 해도 ‘상처뿐인 영광’으로 진보정치에 대한 희망을 거두게 만들지 않을까 진심으로 우려된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물론 정치행위는 ‘최선’을 추구해야 하되, 실제로는 ‘실현가능한 최선’의 한계 안에서 결정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혁세력을 자처하건 진보세력을 대표하건 간에, 오늘의 정치지형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반(反)MB 전략 빼고는 미래전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우려스럽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돌이켜 보면 소수야당인 민주당은 선거 패배 이후 야성(野性)을 강화시켜 확고한 개혁세력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해왔다기보다는 ‘촛불정국’에 기대어 내부개혁과 미래전망에 대한 체계적인 설계를 방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보양당 역시 ‘촛불정국’에서 자못 치열한 장외투쟁을 벌인 것은 인정하겠지만, 변화된 정치적 환경 속에서 과연 정국운영의 아젠다는 고사하고, 진보정치의 미래전략을 얼마나 가다듬고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 대단히 회의적이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사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진보․개혁 세력 전체의 위기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민들의 반MB정서가 높다는 사실이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목표를 지체시킬 수 있는 원인일 수는 없다. 최근의 민주노총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위기는 제대로 된 ‘진보의 재구성’이 없다면, 마치 대처시대의 영국과 같이 보수세력의 장기집권으로 한국정치가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를 현실화시킬 확률이 높다. 이른바 반(反)MB 정서의 고양이 개혁․진보 새력의 입지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키기보다는 ‘보수혁명’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오히려 촉발시켜, 한국판 대처 이미지로 무장할 것이 분명한 ‘박근혜 체제’로 귀결될 확률이 오히려 높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어떤 점에서 보면, 오늘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양립은 영국의 노동당 세력이 노동당과 사민당의 양당체제로 분열된 후, 사민당은 정치적으로 사멸하고 노동당조차 신자유주의의 거센 흐름 속으로 타협해 들어간 영국 진보정당 운동의 역사를 회상하게 만드는 측면도 없지 않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그래서 이 부분에서 우리가 한번쯤 진지하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진보양당이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노동자 중심성’이라는 테제가 과연 오늘의 현실에서도 유효한 진단인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사실 오늘의 민주노총의 위기를 포함하여,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는 개혁․진보세력에 동의하는 유권자들이 선거 국면에서 보수정당에 지지표를 던지는 아이러니는 이면의 더 강력한 현실적 계급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1990년대 이후 일반화된 ‘투자자’라는 정체성이 그것인데, 1960년대 영국 노동당의 선거에서의 패배를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이 ‘투자자’ 정체성에서 찾았고, 1980년대 대처리즘의 확산의 원인을 검토했던 스튜어트 홀이 지적했던 것 역시 노동자들의 ‘투자자’ 정체성으로의 ‘변형’이었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2009년 현재 한국의 노동자 전체가 이 ‘투자자’ 정체성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극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하고 정치적으로는 진보․개혁 세력임을 스스로 공언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나날이 변화하는 증권시황판에 눈길을 던지면서, 자신이 투자한 펀드와 부동산의 등락에 예민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우리는 의지적으로 부정하지 말고 비관적으로 직시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amp;lt;/font&amp;gt;&amp;lt;/span&amp;gt;&amp;nbsp;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노동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진보적 노동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른바 ‘강부자’에 속한 계층이 열렬한 ‘강남좌파’로 변신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 자신이 처해 있는 변화하고 있는 물적 토대의 변화는 동시에 그의 정치적 의식 역시 유동적으로 만들며, 정체성이란 그렇게 역사적 환경변화 속에서 수시로 출렁거리는 액체성에 가까운 것이다.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때문에 오늘의 진보․개혁세력들이 고민해야 될 문제는 이것이다. 평소에는 정치적으로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견해를 표출하고 있던 사람들이 왜 지난 대선국면에서 MB를 지지했는가. 금융자본주의의 세계화에 따라, 그것에 연결된 노동자 정체성과 이데올로기 역시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이 이러한 계급 정체성의 문제나 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한 고민을 성숙하게 전개시키면서, 새로운 리더십의 모델 및 정치적 아젠다를 창출하는 노력을 치밀하게 진행시키지 않는다면, 임박한 재보선의 결과와 무관하게 진보개혁 세력의 정치적 전망은 장기적으로 보자면 어두울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진보의 재구성’이 말이 아닌 실천으로 나타나야 할 때가 지금이다. 그러니 재보선 정국에서의 적전분열 양상이 내게는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amp;nbsp; &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p class=&quot;HStyle0&quot;&amp;gt;&amp;lt;span&amp;gt;&amp;lt;font color=&quot;#000000&quot; size=&quot;4&quot;&amp;gt; &amp;nbsp; &amp;nbsp; &amp;nbsp;&amp;lt;/font&amp;gt;&amp;lt;/span&amp;gt; &amp;lt;br clear=&quot;all&quot;&amp;gt;&amp;lt;/p&amp;gt;
&amp;lt;div&amp;gt;&amp;lt;/div&amp;gt;&amp;lt;br&amp;gt;-- &amp;lt;br&amp;gt;대안지식연구회 &amp;lt;br&amp;gt;정치사회비평 컬럼은 아래 지행네트워크 홈페이지에 링크됩니다(&amp;lt;a href=&quot;http://jihaeng.net/blog&quot;&amp;gt;http://jihaeng.net/blog&amp;lt;/a&amp;gt;).&amp;lt;br&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
&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amp;lt;/p&amp;gt;
&lt;/TEXTAREA&gt; &lt;!-- 메일 내용 End --&gt;&lt;/DIV&gt;&lt;!-- //HM_MAILCONTENT --&gt;&lt;!-- 내용 부분 End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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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4.29 재보선</category>
			<category>적전분열</category>
			<category>진보의 재구성</category>
			<category>진보정당</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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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jihaeng.net/blog/135#entry135comment</comments>
			<pubDate>Thu, 23 Apr 2009 12:38:40 +0900</pubDate>
		</item>
		<item>
			<title>유전자은행법, 디스토피아 혹은 범죄 예방?(김원)</title>
			<link>http://jihaeng.net/blog/133</link>
			<description>&lt;P&gt;유전자은행법, 디스토피아 혹은 범죄 예방? &lt;/P&gt;
&lt;br /&gt;
&lt;P&gt;&lt;br /&gt;김 원(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lt;/P&gt;
&lt;br /&gt;
&lt;P&gt;&lt;br /&gt;&quot;블레이러너&quot;와 공포의 역사 &lt;/P&gt;
&lt;br /&gt;
&lt;P&gt;&lt;br /&gt;리들리 스콧은 &amp;lt;블레이드 러너&amp;gt;란 영화에서, 서기 3000년경 소수 엘리뜨 집단이 첨단과학기술을 독점 하며 다수를 통제하는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그렸다. 지난 세기말부터 과연 인류의 미래는 어떤 색조를 띌 것인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많았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인간의 삶에 장밋빛 미래로 다가올 것인가 등을 둘러싼 회의적인 이야기들도 적지 않았다. 어쩌면 손에 잡히지 않는 ‘공포&#039;를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lt;/P&gt;
&lt;P&gt;이런 공포는 늘 역사적으로 만들어지고 유통되어 왔다. 20세기 초반, 상당수 지식인들은 ‘서구의 몰락’이란 화두를 통해 잠재적인 공포를 공유하기도 했다. 오르케다 이 가제트의 &amp;lt;대중의 반역&amp;gt;이나 1920년대 군중심리론 등의 바탕에 깔렸던 것은 ‘통제하지 못하는 대중’에 대한 잠재적 공포였다. 산업사회 이후 등장한 새로운 익명의 집단인 대중에 대해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것이다. &lt;/P&gt;
&lt;P&gt;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공포는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앞에 등장했다. 그 이름은 나치즘이나 파시즘 등으로 불렸던 집단동원 체제였다. 노골적인 인종주의와 집단살인, 상대편에 대한 이유 없는 적대감 여러 가지 이념들이 착종되어 나타난 이 체제는 서구 사회가 그 동안 쌓아온 민주주의를 근본에서부터 흔드는 또 다른 공포였다. 서구 사회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의 전선 혹은 동맹을 만들어 싸웠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다른 공포가 찾아왔다. 그 공포는 &#039;냉전&#039;이 만들어 낸 &#039;공산주의&#039;라는 적 이었다. 이처럼 인류는 끊임없이 &#039;적을 생산하며 생존&#039;해온 긴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lt;/P&gt;
&lt;P&gt;이 점은 한국도 유사했다. 냉전 하에서 국민의 적은 &#039;빨갱이&#039;라고 불리는 비국민인 &#039;적&#039;이었으며, 적의 재생산은 한 사회의 통합을 유지하는 중추였다. 사회적 불안을 일으키는 요소의 존재 자체가 역설적으로 사회 통합을 가져오는 촉진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유전자은행법은 주목할 만한 흐름이다.&amp;nbsp; &lt;/P&gt;
&lt;br /&gt;
&lt;P&gt;&lt;br /&gt;유전자은행법, 그 쟁점들&lt;/P&gt;
&lt;br /&gt;
&lt;P&gt;&lt;br /&gt;최근 경찰청은 법무부와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quot;유전자은행법&quot; 을 다음 달 공식적으로 입법 예고할 계획임을 밝혔다. 유전자은행법 설치 추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7대 국회에서도 &quot;유전자 감식정보수집법안&quot;이 상정되었지만, 인권 단체들의 강한 반발로 법안은 자동 폐기된 바 있다. 이 법안은 2008년 &#039;안양 초등생 살인 사건&#039; 당시 다시 등장하여 새로이 정비되었으나, 국회에 법안이 제출되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으로 법제화에 급물살을 탔다. 사건 당시 DNA 물증을 통해 강호순의 범죄 사실을 입증했으나, 이에 대한 체계적 관리 시스템은 미비했으며, 이후 검찰과 경찰은 흉악 범죄를 예방하고 범인 조기 검거를 위해 &quot;유전자 감식법안&quot;을 추진 중이다. &lt;/P&gt;
&lt;P&gt;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quot;유전자 감식법안&quot;은 살인, 강도, 강간, 추행, 절도 등 이른바 11대 강력 범죄를 저질러 구속된 피의자와 형이 확정된 수형인을 대상으로 DNA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또한 피의자나 수형자가 유전자 채취를 거부할 경우,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아 강제적으로 채취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 시기와 유사하게, 유전자은행법은 강제적인 DNA수집 등을 통한 인권침해 논란, 점차 DNA 채취 대상이 확대될 경우의 위험성 그리고 수형자가 불기소될 경우 이를 삭제한다고 하나, 과연 이러한 조치가 실제로 이루어질 것인지 여부 등을 놓고 논란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lt;/P&gt;
&lt;br /&gt;
&lt;P&gt;&lt;br /&gt;판옵티콘의 변형된 재림인가&lt;/P&gt;
&lt;br /&gt;
&lt;P&gt;&lt;br /&gt;몇 해 전 인권영화제에서 &quot;6개의 시선&quot;이란 옵니버스 영화 가운데 &amp;lt;그 남자의 정사&amp;gt;라는 소품을 본 일이 있다. 짧은 영화의 줄거리는 한 성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로 인해 주거 공간에서 집 앞에 지문표시가 새겨져 있고, 같이 주거하는 공간에서 철저히 격리되고 배척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었다. 영화는 사회적으로 무시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개인의 인권조차 보호될 때야만 해야 진정한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임을 역설했다. 한 인간이 죄를 짓는다고 하여 평생의 낙인을 찍는 다면 그 사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lt;/P&gt;
&lt;P&gt;이미 한국 사회는 주민등록과 지문을 통해 기본적인 개인 정보에 대한 관리를 오랫동안 시행해왔다. 더군다나 DNA 자료 수집이란 생체 자료 수집은 지문과 주민등록과는 질적으로 다른 성격임에 틀림이 없다. 이처럼 범죄 예방이나 사회 불안을 이유로 하나씩 늘어가는 국가에 의한 개인 정보 수집은 자칫하면 사회안정이란 명목 하에 개인의 사생활과 개인 정보에 대한 무분별한 관리 및 통제로 이어질 가능성 자체를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lt;/P&gt;
&lt;P&gt;일찍이 제레미 벤담은 학교·공장·병원·감옥 등에서 한 사람에 의한 감시체계를 판옵티콘이라 명명했다. 푸코 역시 개인의 모든 행동거지에 관련된 자료가 축적된 데이터베이스가 마치 판옵티콘이 죄수들을 감시하듯이 한 개인의 출산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대중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전체주의적 권력의 도구로 오용될 수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 우리는 범죄 예방을 이유로 판옵티콘의 현대적 재림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죄를 지은 개인의 인권조차 존중하는 사회를 꿈꾸어야 할까?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우리가 갈 길은 후자가 아닐까?&amp;nbsp; &lt;/P&gt;
&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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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33</guid>
			<comments>http://jihaeng.net/blog/133#entry133comment</comments>
			<pubDate>Tue, 14 Apr 2009 21:54:25 +0900</pubDate>
		</item>
		<item>
			<title>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하라(하승우)</title>
			<link>http://jihaeng.net/blog/132</link>
			<description>세상을 살다보면 참 공교롭게도 묘하게 일이 겹칠 때가 있습니다. 어제 간만에 각시의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씨네큐브에 갔는데 &#039;슬럼독 밀리어네어&#039;와 &#039;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039;라는 두 개의 영화를 놓고 고민을 조금 했습니다. &lt;br /&gt;&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center&quot;&gt;&lt;IMG height=140 alt=&quot;&quot; src=&quot;http://cfile5.uf.tistory.com/image/187DF30C49CD85772A5CDB&quot; width=97&gt;&lt;/DIV&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center&quot;&gt;&lt;IMG height=140 alt=&quot;&quot; src=&quot;http://cfile24.uf.tistory.com/image/207DF30C49CD85782B4183&quot; width=97&gt;&lt;/DIV&gt;&lt;br /&gt;둘 다 나름 재미있어 보였거든요. 그러다 더 리더를 보기로 했습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를 그동안 재미있게 봤었거든요.&lt;br /&gt;&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height=160 alt=&quot;&quot; src=&quot;http://cfile24.uf.tistory.com/image/1561380B49CD85FA3351C0&quot; width=110&gt;&lt;/DIV&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height=160 alt=&quot;&quot; src=&quot;http://cfile3.uf.tistory.com/image/1661380B49CD85FA34C34A&quot; width=110&gt;&lt;/DIV&gt;&lt;br /&gt;빌리 엘리어트, 말이 필요없는 영화였죠. 경쾌한 춤과 음악이 이어지면서도 당시 영국 광부들의 파업을 잘 담아냈던...&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디 아워스는 선배들과 함께 봤는데, &#039;디 아더스&#039;라는 공포영화의 속편인 줄 알고, 공포영화 싫다고 했다가 핀잔을 들었다는... 그런데 놀라운 일은 어제 우리 각시도 똑같이 공포영화라고 말했다는...(ㅎㅎㅎ 역시 천생연분이군요) &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하여간 &#039;러 리더&#039;를 봤는데, 멜로 영화일 줄 알았던 영화가 나름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더군요(그런게 달드리 감독의 특기이기는 하지만). 더구나 최근 인권연구소 창에서 진행하고 있는 아렌트 세미나와 완전히 겹쳐버렸어요. &lt;br /&gt;&lt;br /&gt;길에서 구토를 하는 소년을 돌봐줄 정도로 정이 많은 여인 한나, 어린 소년의 호기심으로 그 여인에게 빠져들었던 15살 소년 마이클의 얘기가 영화 전반부를 차지합니다. 어린 마이클은 한나와의 섹스에 빠졌고, 글을 읽지 못하는 한나는 마이클이 읽어주는 책의 세상에 빠져듭니다. 그러다 한나는 마이클을 그 또래들의 세계로 돌려주기 위해 짐을 싸서 떠나죠.&lt;br /&gt;&lt;br /&gt;그렇게 헤어진 뒤 마이클은 법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고, 한나는 나치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되어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범재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한나는 자신이 감시하던 유대인 300명을 살해한 혐의(폭탄이 떨어져 불타는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군 혐의)를 받습니다. 그 지옥에서 탈출한 한 여인이 책을 쓰면서 그 책에 언급된 6명의 독일인이 재판을 받는데 그 중 1명이 한나죠. 여차저차해서 한나가 6명의 죄를 뒤집어쓰게 되는데, 한나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밝히기 싫어 죄를 인정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지요. &lt;br /&gt;&lt;br /&gt;그런데 재판에서 한나가 자신에 관해 얘기한 내용은 아우슈비츠의 소장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얘기했던 내용과 비슷합니다. 매일 수용소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누군가를 정해서 아우슈비츠로 보내야만 했다. 나의 임무는 유대인들을 감시하는 것인데, 문을 열어줬을 경우 그들을 감시할 수 없기 때문에 문을 열어줄 수 없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은 그 사람들에게 친절했지만 한나는 자신의 임무를 넘어서는 행위를 선택하지는 않았지요.&lt;br /&gt;&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height=102 alt=&quot;&quot; src=&quot;http://cfile23.uf.tistory.com/image/207B870A49CD89A92AD79E&quot; width=75&gt;&lt;/DIV&gt;아렌트가 뉴요커의 특파원으로 가서 취재했던 전범재판에서 아이히만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당시 나치의 법률 하에서는 전혀 범죄가 아닌 일을 했고, 공무원으로서 자신이 시킨 일을 &#039;성실히&#039; 했을 뿐이라고 얘기합니다. 아이히만이 심문을 받는 광경을 보면서 아렌트는 &quot;그가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가 죽게 되는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을 받았더라도 그대로 수행했으리라는 데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quot;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어쨌거나 이 광경을 보면서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사람에게서 생각과 판단의 능력을 빼앗아가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사건을 불러오는가를 말하려 했습니다. &lt;br /&gt;&lt;br /&gt;여기까지는 너무 정답같은 얘기이죠. 하지만 저는 달드리 감독과 아렌트의 의도는 이런 정답을 넘어선다고 생각합니다. &lt;br /&gt;&lt;br /&gt;먼저 달드리 감독의 시각을 볼까요? 영화에서 한나는 자기 죄를 피하려 했던 나머지 5명과 달리 그때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한나가 얘기하지 않은 건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점 뿐입니다.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에 한나는 무기징역형을 당하게 되죠. &lt;br /&gt;&lt;br /&gt;그리고 그 점을 알고 있는 마이클은 한나를 위해 증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 한나에 대한 원망이든, 한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분노이든, 마이클은 &#039;정의&#039;라는 이름으로 한나를 버렸던 거죠. 그리고 당시 독일 곳곳에 서 있던 수용소를 이미 알고 있었고 수용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알고 있던 독일인들도 한나를 처벌하면서, 또는 한나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모든 죄를 덮어버립니다. 최소한 한나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얘기하고 그에 관해 생각할 양심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덮어버리는 데에만 급급했죠.&lt;br /&gt;&lt;br /&gt;그리고 한나는 재판을 하는 판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라면 그 때 어떻게 했을 거냐고? 판사는 답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혼자 힘으론 그런 결정을 반대하지 못했을 것이니까요. 그런 결정을 막기 위해 어떻게 사람들을 조직하고 집단적으로 행위할까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으니까요. 누구라도 한나의 위치에 가게 되었을 때 한나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특히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 그런 결정을 반대할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lt;br /&gt;&lt;br /&gt;때로는 양심이 뒤늦게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마이클은 양심(또는 사랑?)을 이기지 못해 이혼을 하고 책을 녹음해서 교도소의 한나에게 보내기 시작합니다. 한나는 그것을 통해 읽고 쓰는 법을 배우며 마이클과 소통을 시도합니다. 읽고 쓰는 법을 배우며 한나는 삶의 활력을 찾기 시작하고 그러다 결국 가석방 허가를 받게 되죠. 가석방을 앞두고 교도소를 찾아온 마이클은 한나를 위해 일자리와 집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나는 목을 매어 자살을 택합니다(왜 자살을 택했는지는 영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저는 &#039;상처&#039;였다고 봅니다). 한나가 남긴 돈은 유대인 문맹퇴치기금에 한나의 이름으로 기부됩니다.&lt;br /&gt;&lt;br /&gt;모두가 홀로코스트를 끔찍한 사건이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끔찍하기에 그 누구도 수용소에 관해 기억하려 하지 않습니다. 마치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그런 일이 있었지라며 씁쓸히 말할 뿐이죠. 하지만 기억되지 않는 사건은 마술처럼 되돌아오기도 합니다. 이제 젊은 딸을 둔 아버지로 늙어버린 마이클이 딸에게 아버지의 삶을 얘기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어쩌면 이 &#039;소통&#039;이 달드리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일지 모르겠네요.모두가 공범으로 변해버린 사회에서는&lt;SPAN id=callbacknestanartistorycom258481 style=&quot;FLOAT: right; WIDTH: 1px; HEIGHT: 1px&quot;&gt;&lt;EMBED id=bootstrapperanartistorycom258481 src=http://anar.tistory.com/plugin/CallBack_bootstrapperSrc?nil_profile=tistory&amp;amp;nil_type=copied_post width=1 height=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swLiveConnect=&quot;true&quot; FlashVars=&quot;&amp;amp;callbackId=anartistorycom258481&amp;amp;host=http://anar.tistory.com&amp;amp;embedCodeSrc=http%3A%2F%2Fanar.tistory.com%2Fplugin%2FCallBack_bootstrapper%3F%26src%3Dhttp%3A%2F%2Fcfs.tistory.com%2Fblog%2Fplugins%2FCallBack%2Fcallback%26id%3D25%26callbackId%3Danartistorycom258481%26destDocId%3Dcallbacknestanartistorycom258481%26host%3Dhttp%3A%2F%2Fanar.tistory.com%26float%3Dleft&quot; EnableContextMenu=&quot;false&quot; wmode=&quot;transparent&quot;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gt;&lt;/SPAN&gt; 그 누구도 과거를 얘기하려 하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그 아픈 상처를 드러내고 얘기하는 것만이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막는 방법일지 모릅니다. &lt;br /&gt;&lt;br /&gt;[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마치 소크라테스의 재판 얘기처럼 한국사회에 잘못 전달되고 있는 듯합니다. 보통 이 책을 &#039;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039;에 관한 보고서라고 얘기합니다. 사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단어는 책의 맨 마지막에 딱 한 번 나옵니다. 아이히만은 재판이 끝난 뒤 아주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데요, 아렌트는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lt;br /&gt;&lt;br /&gt;
&lt;BLOCKQUOTE&gt;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lt;br /&gt;&lt;/BLOCKQUOTE&gt;&lt;br /&gt;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잠깐 판단을 미루고요, 제가 보기에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얘기를 건네고 싶어하는 사람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보며 이 재판이 &quot;‘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렁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quot;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보다는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죄를 물을지에 관해서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사건의 원인을 캐지 않고 그 사건을 덮어버리기 위해 세계적인 쇼를 벌인 셈이죠. 그러니 무능력, 즉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무능력함이 과연 아이히만만의 문제였을까요?&lt;br /&gt;&lt;br /&gt;더구나 아렌트는 당시 유대인 공동체의 상류층들이 자기 민족들을 어떻게 배반했는지도 얘기한다.&lt;br /&gt;&lt;br /&gt;
&lt;BLOCKQUOTE&gt;행정과 경찰 업무에 유대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베를린에서 유대인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던 일은 내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적으로 유대인 경찰에 의한 것이었음) 완전한 혼돈상태에 빠졌거나 독일의 인력 공급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누수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희생자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더욱이 대부분 사무실에서 일하던 그들이 수십만 명의 타인들을 절멸시키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lt;br /&gt;&lt;/BLOCKQUOTE&gt;유대인 공동체를 국가와 분리된 게토로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켰던 유명한 유대인들([전체주의의 기원] 1권에서 얘기되는)은 유대인들을 지옥의 입구로 몰아갔습니다. 이런 상층 유대인들의 배신은 &#039;구원&#039;에서도 드러났습니다.&lt;br /&gt;&lt;br /&gt;
&lt;BLOCKQUOTE&gt;예를 들면 헝가리에서 카스트너 박사는 대략 47만 6,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정확히 1,684명을 구출했다. ‘맹목적인 운명’에 따라 선별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정으로 신성한 원칙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서류에 써서 그로 인해 그들의 삶과 죽음이 나뉘는 연약한 인간의 손을 인도할 힘’이 될 수 있도록, 그런데 이러한 ‘신성한 원칙들’은 누구를 구원으로 이끌어 냈는가? ‘지부르[공동체]를 위해 생명을 바쳐 일한’ 사람들(즉 지도층 인사들)과 ‘아주 저명한 유대인’이라고 카스트너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말하고 있다.&lt;br /&gt;&lt;/BLOCKQUOTE&gt;이렇게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열심히 팔아서, 불쌍한 유대인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세상의 지지를 받지요. 그러니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해야 하나요? 물론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겪은 고통이 무시되어야 하는 건 아니죠. 영화에 잠시 비치듯이 어느 누구도 실감할 수 없을 만큼 그 고통이 컸으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쁘리모 레비나 서경식의 글이나 솔제비친의 소설에서 엿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고통스럽고 아팠다고 해서 모든 게 정당화될 수 있는 건 아니죠. 아렌트는 아마도 그런 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고 난 뒤에 유대인 공동체들의 적이 됩니다.&lt;br /&gt;&lt;br /&gt;아렌트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비유합니다. 예수의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압력에 못이겨 예수를 처형했던 본디오 빌라도는 처형이 끝난 뒤 손을 씻으며 나는 죄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본디오 빌라도는 누구일까요?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선한 사람을 자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영화를 보며, 아렌트의 글을 읽으며 저는 가끔 91년 5월의 기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죽어간 사람들을 지켜봐야 했던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lt;br /&gt;&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height=215 alt=&quot;&quot; src=&quot;http://cfile23.uf.tistory.com/image/177C171049CDAF9E75F42E&quot; width=150&gt;&lt;/DIV&gt;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희망의 말을 남깁니다.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행위의 결과에 대해 인간은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lt;br /&gt;&lt;br /&gt;
&lt;BLOCKQUOTE&gt;&lt;!--StartFragment--&gt;
&lt;P class=본문&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명조&quot;&gt;복음서는 인간은 신이 용서해주기 때문에 자신도 ‘신과 같이’ 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용서할 때만’ 신도 ‘그와 같이’ 인간을 용서해준다고 가르치고 있다. 용서의 의무를 주장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인간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휴먼명조&quot;&gt;자기의 마음을 변화시켜 다시 시작하겠다는 부단한 의지를 통해서만 인간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부여받을 수 있다.&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mso-fareast-font-family: 휴먼명조&quot;&gt; 이런 측면에서 용서는 보복의 정반대이다.&lt;/SPAN&gt;&lt;br /&gt;&lt;/P&gt;&lt;/BLOCKQUOTE&gt;&lt;br /&gt;신은 인간에게 용서하는 힘을 줬다고 합니다. 한나처럼 누구라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고통을 겪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무조건 용서하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아렌트는 &#039;우리 모두의 책임이다&#039;라는 집단적인 고백이 실제로는 그 죄를 은폐하고 방어하기 위한 변명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아렌트의 제자인 베이너의 말처럼 &quot;아렌트에게 용서는 판단에 뒤따르는 것이지 판단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quot;니까요. &lt;br /&gt;&lt;br /&gt;그러니 아렌트는 용서야말로 아주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용서는 남을 위해 내가 베푸는 자비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환원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행위의 결과를 인정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니까요(때로는 그것이 자신에게 너무 고통스러울수도 있는). &lt;br /&gt;&lt;br /&gt;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새로운 정치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건네고 싶으신가요?&lt;br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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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8 Mar 2009 14:20:0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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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법원이 시민불복종을 재판할 수 있을까?(하승우)</title>
			<link>http://jihaeng.net/blog/131</link>
			<description>&#039;인권연구소 창&#039;이 주관하는 철학과 인권 세미나(&lt;A href=&quot;http://www.khrrc.org/index.php&quot;&gt;&lt;STRONG&gt;&lt;FONT color=#717171&gt;http://www.khrrc.org/index.php&lt;/FONT&gt;&lt;/STRONG&gt;&lt;/A&gt;)에 참여하며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글을 다시 읽고 있다. 아렌트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으로 1, 2차 세계대전을 몸소 겪었고,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말, 70년대 초의 정치상황을 관찰하기도 했다. 아렌트가 말한 &#039;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039;라는 개념이 현대적인 인권 개념의 재구성과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다. &lt;br /&gt;&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center&quot;&gt;&lt;IMG height=130 alt=&quot;&quot; src=&quot;http://cfile2.uf.tistory.com/image/113C9B0C49C4E227F4859F&quot; width=129&gt;&lt;/DIV&gt;&lt;br /&gt;아렌트가 인권을 자기 철학의 핵심주제로 다루지는 않았지만(아렌트는 인권보다 시민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이 아렌트의 인권 개념을 비판하며 자기 얘기를 꺼내면서 아렌트의 사상이 자연스레 인권의 주제로 옮겨진 듯하다. 그런데 아렌트의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방식이 아렌트의 사상 전체를 살피고 그 속에서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자연스런 과정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래서 인권활동가나 인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렌트의 여러 책을 함께 읽으며 그 개념의 흔적을 찾아보는 세미나를 하고 있다.&lt;br /&gt;&lt;br /&gt;그와 관련해 아렌트가 쓴 [공화국의 위기]를 읽고 있다. 이 책은 60, 70년대 미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인데, 현재 우리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039;시민불복종&#039;이라는 글에서 아렌트는 당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과 흑인민권운동을 벌이던 시민불복종운동을 다룬다. 아렌트는 어떤 정치적 의견이 공동체 내에서 소통되며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정치라 보고 그런 소통과 관계의 장을 보장하는 것을 권력의 역할이라 봤다. &lt;br /&gt;&lt;br /&gt;아렌트는 어떤 사안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을 경계하는데, 가령 양심적 병역거부는 법을 어기는 행위의 정당성을 개인의 양심에서 찾기 때문에 정치적인 사안을 비정치적인 문제로 환원시킨다. 그러다보니 어떤 개인의 양심과 다른 개인의 양심이 충돌할 때(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흑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킹 목사의 양심과 미시시피의 인종주의자의 양심이 충돌할 때), 그 주장은 타당성을 가지기 어렵다. 더구나 그런 양심이 정당화되려면 그 사람이 선과 악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능력은 자연적으로 타고날 수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봤고 그 근거를 양심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서 찾기를 바랬다.&lt;br /&gt;&lt;br /&gt;
&lt;BLOCKQUOTE&gt;&lt;FONT color=#5fb636&gt;양심적인 거부자와는 달리 불복종 시민은 한 집단의 성원이며 싫든 좋든 이 집단은 자발적 결사를 이루는 것과 같은 정신에 따라 형성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논의에서 가장 큰 오류는 우리가 개인들―그들은 자신을 주관적이며 양심에 따라 사회의 습관과 법에 도전한다―을 다루고 있다는 가정이다.&lt;/FONT&gt;&lt;br /&gt;&lt;/BLOCKQUOTE&gt;&lt;br /&gt;&lt;br /&gt;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을 구분하면서 시민불복종을 중요한 정치행위로 바라본다. 왜냐하면&lt;br /&gt;&lt;br /&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mso-fareast-font-family: 바탕&quot;&gt;&lt;/P&gt;
&lt;BLOCKQUOTE&gt;&lt;SPAN lang=EN-US style=&quot;mso-fareast-font-family: 바탕&quot;&gt;&lt;FONT color=#5fb636&gt;불복종 시민의 실상은 조직된 소수집단이며, 공동이익이라기보다는 공동의견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고, 정부의 정책이 다수에 의해 지지받을 것을 알 경우라도 그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서리라는 결의를 갖는다. 그들의 일치된 행동은 그들의 일치된 의견에서 나온다.&lt;br /&gt;&lt;/FONT&gt;&lt;/SPAN&gt;&lt;/SPAN&gt;&lt;/BLOCKQUOTE&gt;시민불복종은 자신의 행위가 현재의 법질서를 해치거나 다수의 상식과 반대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여러 시민들이 힘을 모으는 정치행위이다. 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법질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거나 정부가 적법하고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고 음모를 꾸밀 때에, 시민불복종은 변화를 이룰 유일한 수단이다. 아렌트는 당시 미국사회가 이런 상태(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전쟁을 벌이고 정보기관이 은밀히 활약하는)였다고 보고 시민불복종 행위를 미국의 건국행위만큼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미국의 건국행위란 따져보면 식민지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시민불복종이었기 때문이다.&lt;br /&gt;&lt;br /&gt;다만 시민불복종은 공개적으로 법에 도전하기 때문에 일종의 딜레마를 가진다. 사회가 유지되고 정치가 이루어지려면 그 경계를 짓는 법이 필요한데, 시민불복종은 그 법의 경계를 넘어서려 하기 때문이다.&lt;br /&gt;&lt;br /&gt;그 점에서 아렌트는 법조문보다 법의 정신이 중요하고 준법정신이 입법자의 태도를 가질 때,&lt;SPAN id=callbacknestanartistorycom225747 style=&quot;FLOAT: right; WIDTH: 1px; HEIGHT: 1px&quot;&gt;&lt;EMBED id=bootstrapperanartistorycom225747 src=http://anar.tistory.com/plugin/CallBack_bootstrapperSrc?nil_profile=tistory&amp;amp;nil_type=copied_post width=1 height=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wmode=&quot;transparent&quot; EnableContextMenu=&quot;false&quot; FlashVars=&quot;&amp;amp;callbackId=anartistorycom225747&amp;amp;host=http://anar.tistory.com&amp;amp;embedCodeSrc=http%3A%2F%2Fanar.tistory.com%2Fplugin%2FCallBack_bootstrapper%3F%26src%3Dhttp%3A%2F%2Fcfs.tistory.com%2Fblog%2Fplugins%2FCallBack%2Fcallback%26id%3D22%26callbackId%3Danartistorycom225747%26destDocId%3Dcallbacknestanartistorycom225747%26host%3Dhttp%3A%2F%2Fanar.tistory.com%26float%3Dleft&quot; swLiveConnect=&quot;true&quot;&gt;&lt;/SPAN&gt; 즉 내가 곧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자 스스로 그 법에 복종하는 사람(인민주권이라고 해야 할까)일 때 가능하기 때문에 시민불복종이 정당하다고 본다. 특히 새롭게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합의하지 않은 그 사회의 질서에 도전하고 문제를 제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불복종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lt;br /&gt;&lt;br /&gt;그리고 아렌트는 그런 불복종이 약속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람의 행동이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간의 합의와 약속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민은 불복종을 하는 만큼 자신이 시민으로서 따를 수 있고 따라야 하는 것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lt;br /&gt;&lt;br /&gt;이 글에서 흥미로운 내용은 시민불복종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법률가들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법률가들은 이런 시민공동체의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인 행동을 개인의 범죄행위로 다루기 때문이다. &lt;br /&gt;&lt;br /&gt;
&lt;BLOCKQUOTE&gt;&lt;FONT color=#5fb636&gt;왜냐하면 그들은 불복종 시민을 한 집단의 성원으로 인정하기보다는 법정에서 피고가 될 개인적 범법자로 간주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개인에 대한 정의의 할당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다른 모든 것―피고는 다른 자들과 함께 뜻을 하며 법정에서 그를 진술하려 한다는 여론이나 시대정신(Zeitgeist)―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재판절차의 위풍이다.&lt;/FONT&gt;&lt;br /&gt;&lt;/BLOCKQUOTE&gt;법은 법에 대한 불복종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는 시민불복종의 권리가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 권리(결사의 권리)와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치제도는 불복종하는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도록 보장해야 한다. 아렌트는 로비스트들이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시민불복종하는 단체들이 압력단체를 만들어 정부를 압박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헌법 제 1조가 보장하는 결사의 권리가 현실에서 제대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위기에 빠졌다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lt;br /&gt;&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center&quot;&gt;&lt;IMG height=120 alt=&quot;&quot; src=&quot;http://cfile23.uf.tistory.com/image/173CF80C49C4F107A41C58&quot; width=99&gt;&lt;/DIV&gt;&lt;br /&gt;&lt;br /&gt;이런 분석은 지금 한국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이 사회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요즘은 이런 방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자신의 주장을 더이상 받아주지 않는다고 여긴 시민들이 곳곳에서 촛불을 들고 저항하고 있다. 정부는 이 저항을 법으로 가로막으려 하지만 아렌트가 얘기하듯 촛불시민들의 불복종 행위에 대한 판단은 법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정치행위는 기존의 정치질서가 가진 문제점 때문에 비롯된 것이고 시민들은 불복종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위기는 아주 심각하다. &lt;br /&gt;&lt;br /&gt;국회의원이나 관료들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들을 자꾸 법원으로 가져가서 해결하려 하는데, 그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법원은 그 의제를 사회와 소통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려 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기에 적절하지 않은 기관이다. 그리고 그 사법적인 판단의 잣대는 이미 낡은 것으로 새로이 나타나는 것을 규정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의 사법계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충원되지도 않고 그 작동과정 역시 민주적이지 않다(최근에는 아예 대놓고 판결에 개입하기도 하니).&lt;br /&gt;&lt;br /&gt;아마도 이명박 정부는 이런 정치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게 뻔하다. 시민불복종의 권리는 짓밟히고 그와 함께 결사의 권리,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단체를 자유로이 만들 권리도 무기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lt;br /&gt;&lt;br /&gt;어쩌면 이제 저항은 아주 근본적인 수준으로 진행되어야 할지 모른다. 권력이 정치를 포기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때, 저항은 건국행위 수준의 정치행위를 지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단순히 법에 복종하지 않고 정부에 저항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사람들이 맺을 새로운 약속, 새로운 결사들을 만들며, 그들의 국가를 버리고 우리들의 공동체를 조금씩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비폭력 불복종의 정신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터져나와야 한다.&lt;br /&gt;&lt;br /&gt;이제 개인으로 흩어지지 말고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정치행위는 국가가 보장하는 시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근본적인 조건이다.

&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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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2 Mar 2009 00:28:0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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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039;불화의 정치&#039;와 그에 대한 비판(김정한)</title>
			<link>http://jihaeng.net/blog/130</link>
			<description>&lt;DIV&gt;&lt;FONT size=2&gt;&lt;FONT size=2&gt;*편집자주: 진보개혁의 위기, 이명박 정권의 등장, 촛불시위, 경제위기...민주화 20년을 경과하면서 최근 우리들이 &#039;체험&#039;하고있는 정치사회적 현상들입니다. 그 현상들의 핵심에 놓여져있는 것이 바로 &#039;민주주의&#039;의 문제일 것입니다. &amp;nbsp;이번 비평은 바로 그러한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사색을 최근 한국에 소개된 랑시에르의 텍스트를 통해 전개해본 것입니다. &amp;nbsp;필자(김정한 연구위원)는 랑시에르의 논의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사색의 길을 개쳑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즉 랑시에르는 &quot;민주주의를 통치양식이나 정치체계가 아니라, 기존 사회 질서와 단절하고 새로운 공동체(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삶의 양식이며, 그 과정에서 정치적 주체가 구성되는 주체화양식&quot;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얼마나 민주주의에 대한 그간의 논의에 있어서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는 향후의 논쟁과 같은 집단적-상호소통적 지적 행위를 통해 살펴볼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랑시에르의 논의에서 민주화 이후 우리가 민주주의를 우리의 삶과 괴리된 그 무엇으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아니었는지 곰곰히 사유하게끔 만드는, 그래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단지 체험이 아니라 인식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하는 하나의 계기를 찾을 수 있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일독과 토론의 제기를 기대합니다. &amp;nbsp; &amp;nbsp;&lt;/FONT&gt;&lt;/DIV&gt;
&lt;DIV&gt;
&lt;DIV align=left&gt;&amp;nbsp;&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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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align=center&gt;* * * * * &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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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align=center&gt;&lt;STRONG&gt;&lt;FONT size=3&gt;‘불화의 정치’와 그에 대한 비판&lt;/FONT&gt;&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김정한 &lt;/DIV&gt;
&lt;DIV align=center&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lt;br /&gt;지난주에 자크 랑시에르가 다녀갔지만, 나는 독감으로 두문불출하느라 그를 대면하지 못했다. 마침 10월 말에 &amp;lt;텍스트&amp;gt;의 청탁으로 &amp;lt;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amp;gt;에 대한 서평을 써둔 터라 몇 가지 질문꺼리도 있었는데, 아쉬움이 없지 않다. 그 대신 &amp;lt;무지한 스승&amp;gt;이 그의 방한 강연에 맞춰 출간되었으니 당분간 이 책을 읽으며 그의 답변을 상상이나 해봐야겠다. &amp;lt;텍스트&amp;gt;의 양해를 얻어 서평의 일부를 소개한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lt;STRONG&gt;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방식&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꿈처럼 그리던 시절이 지나간 후, 국내에서 민주주의는 거의 ‘죽은 언어’에 가까워진 것이 사실이다. 사회 변화를 향한 열정을 끌어내기는커녕,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적극적인 저항조차 민주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묵살되는 상황이 다반사이다. 여기에는 형식적 민주주의(정치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구분하고, 전자를 지키면서 후자를 심화해야 한다는 판에 박힌 민주주의 담론들도 한몫한다. 민주주의는 실천적으로든 이론적으로든 진부해지는 중이다. 최근 국내에서 랑시에르가 새삼 주목받는 이유도 어쩌면 그가 민주주의를 통해 저항을 사유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흔히 지식인들은 평등을 선언하는 법과 불평등한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 법 앞의 평등은 불평등한 현실을 은폐하는 환영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당한 노동조건이 법에 기입된 평등에 위배된다고 논리적으로 지적하고, 법에 맞게 불평등한 노동조건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문장을 입증하기 위해 파업을 전개한다. 이것이 1830년 프랑스혁명 직후 노동자들이 사고하고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랑시에르는 이를 ‘해방의 삼단논법’이라고 지칭한다. 대전제(법 앞의 평등)와 소전제(불평등한 현실)를 경험하면서 노동자들은 대전제에 맞게 소전제를 바꿔서 대전제를 증명하려 한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그래서 랑시에르는 평등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이며, 행위를 통해 증명하는 것이라고 개념화한다. 해방이란 평등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 능력을 통해 스스로 입증하는 실천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적 삶(vita democratica)이다. 여기서 ‘삶’이라고 표현하듯이,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통치양식이나 정치체계가 아니라, 기존 사회 질서와 단절하고 새로운 공동체(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삶의 양식이며, 그 과정에서 정치적 주체가 구성되는 주체화양식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lt;STRONG&gt;치안과 정치의 불화&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이렇게 한쪽에 기존 사회 질서가 있고, 다른 쪽에 민주주의가 있다. 이런 기본적인 이분법은 랑시에르 철학의 주요 개념들에서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우선 한쪽에 치안(police)이 있고, 다른 쪽에 정치(la politique)가 있다. 치안은 사회 질서를 조직하고 자리와 기능을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통치과정이고, 정치는 평등 전제와 이를 입증하는 평등과정이다(따라서 정치와 민주주의는 동의어이다). 치안은 평등을 방해하고 정치는 치안을 방해한다.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은 치안과 정치, 통치과정과 평등과정이 마주치는 무대이며,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는 이 무대의 경계이다. 치안은 통치원리(archē)에 따라 사회 질서를 구성하지만, 정치는 치안 질서에 끊임없이 침입하고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또한 한쪽에 군중(ochlos)이 있고, 다른 쪽에 인민(demos)이 있다. 군중이 지배 논리에 갇혀 있는 정념에 빠진 개인들의 결집이라면, 인민은 지배 논리와 단절하는 민주주의의 주체이다. 군중은 치안 질서를 유지하는 합의에 집착하고, 인민은 그것에 침입하여 군중을 분할하는 불화(mésentente)를 추구한다. 치안은 통치할 자격이 없는 인민을 셈에서 배제하고 몫을 나눠주지 않지만(따라서 인민은 치안 질서의 예외, 공백, 텅빈 요소이다), 평등을 전제하는 인민은 몫이 없는 자로서 자신의 몫을 단언하고 셈해질 자격이 없는 자로서 자격을 주장한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따라서 인민은 빈민이나 하층민과 같은 사회학적 범주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불안정하게 출현하고 소멸하는 정치적 주체이다. 정치적 주체의 구성은 타자가 치안 논리로 고착시킨 동일성(identity)을 거부하고, 듣지 않는 타자를 향해 말하지 않아야 하는 자로서 말을 걸며, 셈 바깥으로 배제된 추방자와 스스로 동일시하는, 동일시할 수 없는 타자(‘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와 동일시하는 ‘불가능한 동일시’를 내포한다. 이와 동시에 정치적 주체화는 세계를 지각하는 감각 체계(감각적인 것의 나눔)를 변화시킨다.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것을 나누고 배제하는 치안 원리에 맞서, 그런 감각적인 것들을 새롭게 배분하고 배치한다. 이는 기존 세계에서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들리도록 하고 보이도록 하는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일이다. 여기서 정치와 미학이 겹쳐지며, 감각적인 것을 나누는 두 가지 방식, 치안과 정치의 대립 및 불화가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이룬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lt;STRONG&gt;포스트알튀세르주의자들의 비판 - 발리바르, 지젝, 라클라우&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이제 막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랑시에르 철학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랑시에르와 일정하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포스트알튀세르주의자들(지젝이 규정하듯이, 알튀세르와 거리를 두면서도 알튀세르를 참조한다는 의미에서)이 어떤 논점을 제기하고 있는지 간략히 확인하고 넘어갈 필요는 있겠다. 이는 랑시에르를 이해하는 데에도 우회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먼저, 발리바르는 랑시에르가 정립한 불화의 정치가 해방의 정치를 보여주는 중요한 모델이라고 평가하지만,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할 때 그들이 과연 보편성(“시민적 인류의 잠재적 전체”)을 담지할 수 있을 것인지 질문한다(&amp;lt;대중들의 공포&amp;gt;, 도서출판 b, 2007, 36-37쪽). 역사적으로 보자면, 그들의 투쟁은 이미 선언된 권리에서 배제된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관계(“보편적 희생자의 파토스”)로 나타나기 때문에, 보편적 헤게모니를 획득하는 데 곤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가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주장할 때, 그리고 여성이 성평등을 단언할 때, 비정규직 노동자와 여성 가운데 어느 쪽도 몫이 없는 자들 전체를 대표하기는 쉽지 않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다음, 지젝은 랑시에르가 어떻게 저항하기를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견실한 개념화를 제시하고 있지만(&amp;lt;감성의 분할&amp;gt;, 도서출판 b, 2008, 114쪽), 치안과 정치의 불화를 통해 과연 치안 질서를 궁극적으로 전복할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amp;lt;까다로운 주체&amp;gt;, 도서출판 b, 383-391쪽). 치안 질서를 방해하는 몫이 없는 자들의 활동은 치안 질서를 늘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으며, 치안과 정치를 대립시켜 치안 질서를 향해 끊임없이 불가능한 요구를 제기하는 일은 결국 ‘치안 질서에 내속하는 정치’를 떠맡아 실행하려 하지 않는 태도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스스로 주인이 되는 대신 주인을 향해 히스테리적으로 도발하는 데 머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젝은 치안 질서를 전복시켜 새로운 실정적 질서로 전환시키는 활동에 대해 어떤 두려움(‘원-전체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비꼬기도 한다(실제로 랑시에르는 “우리는 원하는 만큼 개인들을 해방시킬 수 있지만, 결코 한 사회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180-181쪽)고 말한다). 진정한 전복적 활동은 사회 체계를 운영할 책임을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 지젝이 국가를 운영하는 부담스런 과제를 기꺼이 떠맡은 레닌을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마지막으로, 라클라우는 랑시에르의 분석이 자신의 급진민주주의 전략에 상당히 근접한다고 평가한다(Populist Reason, Verso, 2005, 245-248). 셈할 수 없는 것이 셈하는 원리 자체에 파열을 내는 랑시에르의 개념화는 한 부분(특수성)이 전체(보편성)로서 기능하는 자신의 헤게모니 논리와 유사하며, 특수한 투쟁이 자신의 특수성을 초월하는 상징적 의미와 결부될 때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과정을 예리하게 지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클라우는 인민이 과연 진보적 동일성을 중심으로 구성될 것인지는 선험적으로 보증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담론 형식은 본래 비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랑시에르가 정치의 가능성을 해방정치의 가능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고, 그것이 파시즘적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물론 이렇게 제기되고 있는 쟁점들이 과연 랑시에르의 철학에 비춰볼 때 얼마나 타당한지 여부도 차후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랑시에르를 읽어야 할 이유가 더 추가되고 있는 셈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left&gt;&amp;nbsp;&lt;/DIV&gt;&lt;/FONT&gt;&lt;/DIV&gt;
&lt;P&gt;&lt;br /&gt;※ 편지내용이 잘 안보이시면 &#039;원문보기&#039;를 눌러서 보시기 바랍니다. 브라우저에서 해당 언어의 인코딩을 지원해야 합니다.&lt;br /&gt;&lt;br /&gt;&lt;A href=&quot;http://wwl389.hanmail.net/Mail-bin/view_submsg.cgi?TM=Yc9Q727BFSPMAt7dK%2FOffx41tQgA21KCHyRSTzlGhq9FTwi%2FFi4wnbm96yHKHJRFd5p6kmIc1X%2Fqw0ctCL5Xv0ZhGgGIbABVJDE%2FdpN6wqUoLigwG3X6nHbwEARWGR1TZm7qZ7FgjQljlhx2xKsYHD3k71rh3SFgZT1VqnGaaDOdow3WbLJ0tUU2xpBEHV0cuaxUHgQCaC%2F%2BjPbFvWH7XQ%3D%3D&amp;amp;MSGID=z000000000J9jgi&amp;amp;pos=18764&amp;amp;bodylen=19128&amp;amp;type=foreign&quot;&gt;원문보기&lt;/A&gt;&lt;br /&gt;언어종류: utf-8&lt;br /&gt;Content-Type: text/html &lt;TEXTAREA id=RE_CONTENT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lt;!DOCTYPE HTML PUBLIC &quot;-//W3C//DTD HTML 4.0 Transitional//EN&quot;&am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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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amp;gt;&amp;lt;FONT size=2&amp;gt;&amp;lt;FONT size=2&amp;gt;*편집자주: 진보개혁의 위기,&amp;amp;nbsp;이명박 정권의 등장, 촛불시위, 
경제위기...민주화 20년을 경과하면서 최근 우리들이 &#039;체험&#039;하고있는 정치사회적 현상들입니다. 그 현상들의 핵심에 놓여져있는 것이 바로 
&#039;민주주의&#039;의 문제일 것입니다.&amp;amp;nbsp;&amp;amp;nbsp;이번&amp;amp;nbsp;비평은&amp;amp;nbsp;바로 그러한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사색을 최근 한국에 소개된 
랑시에르의 텍스트를 통해 전개해본 것입니다.&amp;amp;nbsp;&amp;amp;nbsp;필자(김정한 연구위원)는 랑시에르의 논의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사색의 길을 
개쳑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amp;amp;nbsp;즉 랑시에르는 &quot;민주주의를 통치양식이나 정치체계가 아니라, 기존 사회 질서와 단절하고 새로운 
공동체(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삶의 양식이며, 그 과정에서 정치적 주체가 구성되는 주체화양식&quot;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얼마나 민주주의에 대한 그간의 논의에 있어서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는 향후의 논쟁과 같은 집단적-상호소통적 지적 행위를 통해 살펴볼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랑시에르의 논의에서&amp;amp;nbsp;민주화 이후 우리가 민주주의를 우리의 삶과 괴리된 그 무엇으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아니었는지&amp;amp;nbsp;곰곰히&amp;amp;nbsp;사유하게끔 만드는, 그래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단지 체험이 아니라 
인식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하는&amp;amp;nbsp;하나의 계기를 찾을 수 있는&amp;amp;nbsp;틀림없는 것 같습니다.&amp;amp;nbsp;독자 여러분들의 
일독과&amp;amp;nbsp;토론의 제기를 기대합니다. &amp;amp;nbsp;&amp;amp;nbsp;&amp;amp;nbsp;&amp;lt;/FONT&amp;gt;&amp;lt;/DIV&amp;gt;
&amp;lt;DIV&amp;gt;
&amp;lt;DIV align=left&amp;gt;&amp;lt;FONT size=2&amp;gt;&amp;lt;/FONT&amp;gt;&amp;amp;nbsp;&amp;lt;/DIV&am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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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 align=center&amp;gt;&amp;lt;FONT size=4&amp;gt;&amp;lt;/FONT&amp;gt;&amp;amp;nbsp;&amp;lt;/DIV&amp;gt;
&amp;lt;DIV align=center&amp;gt;&amp;lt;STRONG&amp;gt;&amp;lt;FONT size=3&amp;gt;‘불화의 정치’와 그에 대한 비판&amp;lt;/FONT&amp;gt;&amp;lt;/STRONG&amp;gt;&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amp;nbsp;&amp;lt;/DIV&amp;gt;
&amp;lt;DIV align=center&amp;gt;김정한 &amp;lt;/DIV&amp;gt;
&amp;lt;DIV align=center&amp;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amp;nbsp;&amp;lt;/DIV&amp;gt;
&amp;lt;DIV align=left&amp;gt;&amp;lt;BR&amp;gt;지난주에 자크 랑시에르가 다녀갔지만, 나는 독감으로 두문불출하느라 그를 대면하지 못했다. 마침 10월 말에 
&amp;amp;lt;텍스트&amp;amp;gt;의 청탁으로 &amp;lt;/body&amp;gt;&amp;lt;/html&amp;gt;&lt;/TEXTAREA&gt;&lt;/P&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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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김정한</category>
			<category>랑시에르</category>
			<category>정치</category>
			<category>치안</category>
			<category>포스트 알튀세르주의</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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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5 Dec 2008 10:28:25 +0900</pubDate>
		</item>
		<item>
			<title>명바기네이터와 생태계 멸망의 날(하승우)</title>
			<link>http://jihaeng.net/blog/129</link>
			<description>&amp;nbsp;*편집자주: 경제&#039;위기&#039;라는 말로도 우리네 서민들이 겪는 삶의 힘겨움을 설명할 수 없는 이 겨울, 대통령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후보시절의 그가 오히려 더 무게감이 있었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네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를 더욱 많이 입에 올리고 있습니다. 마치 미국 국민들이 된 것처럼 오바마 당선자에게서 희망을 찾고 있는 듯이 보일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여전히 발휘되고 있지 못한 채, 바람직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정치사회비평은 바로 그런 문제를 약간은 &#039;코믹한&#039; 터치로 짚어보고 있다 하겠습니다. 경제위기를 포함해 한국사회가 처해있는 현재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대통령과 정부의 위기관리 혹은 위기극복을 위한&amp;nbsp; 역량일 것입니다. &amp;nbsp;&#039;불편한 진실&#039;일런지 모르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가 잘해야만 한다는 상황 개선을 위한 단초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의 보다 전향적인 발상과 실천의 전환을 촉구해봅니다. &amp;nbsp; 
&lt;DIV align=left&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STRONG&gt;명바기네이터와 생태계 멸망의 날&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하승우&lt;/FONT&gt;&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지난 11월 이명박 대통령은 빡빡한 미국방문 일정에도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만나 한미FTA 등 현안을 논의했다 한다. 연방국가인 미국에서 상원의원도 아닌 주지사를 만나 왜 한미FTA와 같은 국가간 협정을 논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미국경제가 먼저 살아나야 다른 나라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미국경제, 그 안에서 비중이 큰 캘리포니아 경제가 살아나는 것이 중요하다”며 미국경제를 걱정하는 발언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요즘처럼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도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경제까지 걱정해주니 그 따뜻한 연대감에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눈물을 흘렸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방문과 대화내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아마도 이런 깜짝 이벤트는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취향인 듯하다. 영화 &amp;lt;터미네이터&amp;gt;를 보고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어쨌거나 아놀드를 만나서인지 이명박 대통령은 국내로 돌아오자마자 결연한 각오를 밝혔다. 지난 27일 “일시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목숨을 던질 그런 자세로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하겠다고 말하지 않나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는 공자님 말씀을 인용하며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던져라”는 자세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28일에는 “먼 훗날 몸을 던져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한층 더 터프한 모습으로 돌아온 우리의 대통령, 우리는 박수치며 환영해야 할까?&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STRONG&gt;지금 정녕 필요한 것이 집회대응예산?&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무엇을 결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터미네이터의 장비는 곧 장만할 태세이다. 정부가 이번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에 따르면, 경찰청은 집회대응 예산으로 48억 5,400만원을 신청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만만치 않다. 야간 조명차 2대, 물대포 3대, 물보급차 4대, 차벽트럭 17대, 신형보호복 2,106벌, 무선망 수신기 3,606개, 중형소화기 255개, 소형소화기 2,106개, 첨단채증장치 3세트 등이다. 예산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업그레이드된 터미네이터 군단을 곧 거리에서 만날 수 있을 듯하다.&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lt;FONT size=2&gt;
&lt;DIV&gt;&lt;br /&gt;그런데 문제는 정치가 터미네이터식의 전쟁일 수 없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사회에서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고, 그래서 정치의 세계는 다양한 의견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보장해야 한다. 이상적인 정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현실 정치는 여러 협상과 타협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난 너만 구하면 된다’는 터미네이터식 발상은 정치의 세계가 구성되는 원리인 견제와 균형, 타협과 협상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영화를 보면 로봇조차도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런데 우리의 대통령은?).&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목숨을 바쳐 일을 하겠다는 우리 대통령의 자세는 이번에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가 화해와 통합을 강조한 것과 사뭇 대조를 이룬다. 대체 어떤 목표를 세웠길래 정치의 기본을 무시하고 온갖 첨단 장비로 무장하며 목숨을 바쳐 그것을 추진하겠다는 걸까? 아직 모든 게 분명하지 않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입장을 바꾸는 정부인지라 뭘 하겠다는 건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되도않는 청년실업대책&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래도 우리 대통령은 친절하게 라디오로 자신의 입장을 직접 밝히는 편이니 얘기를 들어보자. 귀국한 뒤의 첫 라디오연설 주제는 청년실업이었다. 그러면 청년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한 목숨 바쳐 일하겠다는 걸까?&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불행히도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자신의 경험담까지 들며 많은 얘기를 했지만 건질 만한 얘기는 이 정도인 듯하다. 세상에 경험만큼 소중한 스승은 없으니 비정규직이든, 임시직이든 무조건 취직해서 노조가 있건 없건 찍 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대라 일하라(월급은 제때 받으려나?). 이율곡 선생을 본받아 청년리더 10만 명을 양성하기 위해 7,500억원의 예산을 특별히 편성하겠으니 불만을 가지지 말라(1인당 750만원씩 나누나?). 그래도 국내에 일자리가 없으면 해외로 10만 명을 파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4대 보험은 되려나?)는 얘기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허나 어떡하나? 실업자통계에 잡히지 않는 취업준비생까지 합치면 청년실업자는 수는 대략 15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10만을 양성하고 10만을 파견해도 청년실업율을 낮추기엔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또다시 대운하? &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래서인지 우리 대통령은 정말 목숨을 바칠 만한 필생의 역작을 슬며시 다시 꺼내고 있다. “4대 강 정비사업이면 어떻고, 운하면 어떠냐”라는 말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4대강을 정비하면 그것이 곧 대운하가 아니겠는가.&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터미네이터를 좋아하는 명바기네이터가 돌아왔다. 그것도 예전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서 촛불시위 정도는 쉽게 막을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한반도의 생태계는 다시 한번 멸망의 날을 맞이하고 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 지난 정치사회비평은 지행넷(&lt;A href=&quot;http://jihaeng.net/&quot;&gt;http://jihaeng.net&lt;/A&gt;) 정치사회비평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기타 문의는 편집자(김윤철 &lt;A href=&quot;http://mail5.daum.net/hanmail/mail/MailComposeFrame.daum?TO=o:disorder@naver.com&quot; target=right&gt;disorder@naver.com&lt;/A&gt; 010-3659-4593 )에게 주시면 되겠습니다&lt;/DIV&gt;&lt;/FONT&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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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대운하</category>
			<category>정치의 세계</category>
			<category>집회대응예산</category>
			<category>청년실업대책</category>
			<category>하승우</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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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4 Dec 2008 17:14:08 +0900</pubDate>
		</item>
		<item>
			<title>상업적 성공이 문학적 완성을  보증하는가(오창은)</title>
			<link>http://jihaeng.net/blog/128</link>
			<description>&lt;DIV&gt;&lt;FONT size=2&gt;* 편집자주: 문학은 정치-사회적 상황에 &#039;연루&#039;되어있는 우리네 삶 내면에 대한 조명일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은 우리가 지양해야하거나 지향해야하는 가치와 규범들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문학이 정치사회비평의 주요한 이야기꺼리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번 정치사회비평은 문학이 &#039;부끄러움을 비추는 거울&#039;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건국 60년, 한도 많고 사연도 많았던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어오며 -황석영 작가만이 아니라-저마다 대견스러운 삶의 이력을 일구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세월은 또한 부끄러움을 잃어왔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논리로, 허구적인 수구-개혁과 보수-진보의 대립으로 &#039;누추한 인간의 군상&#039;을 만들어왔던 것은 아니었는지 되새겨볼 일입니다. &amp;nbsp;정치의 위기, 경제의 위기가 거론되는 2008년 한국, 우리네 삶 내면의 부끄러움을 짚어보는 것 또한 위기극복을 위한 실천의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의 이 글이 그러한 실천을 위한 것으로 읽히기를 청합니다. 감사합니다. &lt;/FONT&gt;&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lt;/FONT&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lt;/FONT&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lt;STRONG&gt;&lt;FONT size=3&gt;상업적 성공이 문학적 완성을 보증하는가?&lt;br /&gt;&lt;/FONT&gt;-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 비판&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오창은&lt;/FONT&gt;&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FONT&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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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br /&gt;&lt;STRONG&gt;‘입석부근’과 황석영 신화&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1960년대 문학청년들에게 황석영과 최인호는 영웅이었다. 황석영은 1962년 고교생의 신분으로 &amp;lt;사상계&amp;gt; 신인문학상에 입상하는 기염을 토했고, 서울고 재학 중이던 최인호도 1963년에 &amp;lt;한국일보&amp;gt;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입선을 해 부러움을 샀다. 당시, 황석영은 황수영이라는 이름으로 「입석부근」을 투고해 가작을 받았는데, 경복고를 중퇴한 시점에서 수상이 결정되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새로운 문인의 탄생으로 일간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1950년대 후반에 문인 인구가 3백여명 정도였으니, 황석영과 같은 젊은 신예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신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유추할 수 있다. 눈여겨 볼 부분은 1962년 11월호 &amp;lt;사상계&amp;gt;에 발표된 신인상의 당선작이 서정인의 「후송」이었고, 공동가작이 박순녀의 「아이․러브․유」였다는 사실이다. 서정인과 박순녀는 1960․70년대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하게 평가하는 문인이다. 이렇게 입상작이 많게 된 이유에 대해 &amp;lt;사상계&amp;gt;는 ‘심사경위’에서 “금년에는 당선작 하나만 낼 것이 아니라 버리기 아까운 두 작품을 가작으로 하여 발표하자는데 심사위원들은 원만히 합의를 보았”다고 밝혔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황석영은 개인적 고통의 근원을 찾기 위해, 사회적 고통으로 뛰어든 작가였다. 젊은 시절에 그는 자기 표현에 목말라하며, 등산의 여정에 빗대어 삶의 고난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이것이 「입석부근」(1962)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가출과 방랑생활의 편린들은 「삼포가는 길」(1973)과 「객지」(1971)에 흩뿌려져 있으며, 베트남전쟁에서 경험한 부조리한 상황과 ‘박정희 군대’의 어두운 역사는 「탑」(1970)과 「낙타누깔」(1972), 그리고 &amp;lt;무기의 그늘&amp;gt;(1988)에 고스란히 둥지를 틀고 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는 개인적인 길을 걸으며 시대의 길을 가늠했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끌어안아 문학으로 육화시킴으로써 ‘인간과 문학’의 관계를 밀착시켜 나갔다. 이제, ‘위대한 청년 황석영’이 노년기에 접어들고 있다. 과연 황석영은 삭정이 같은 노년의 스산함을 넘어 ‘세대와 공감하는 문학’을 구현해 낼 수 있을까? 그 실험대에 황석영의 신작 &amp;lt;개밥바라기별&amp;gt;(2008)이 놓여 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불을 삼킨 혀의 이야기&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lt;개밥바라기별&amp;gt;은 1960년대 젊은 황석영의 ‘방황과 좌절, 그리고 영웅담’을 담고 있는 장편소설이다. 황석영의 청춘이 &amp;lt;개밥바라기별&amp;gt;에 ‘회색의 바탕화면에 낭만적 색채를 가미한 채색화’로 그려지고 있다. 문청들의 질시와 기대 속에서 화려하게 성장했을 듯한 황석영의 이면에는 ‘아픈 청춘의 몸부림’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에 이르러 한국문학은 대중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문학적 실천의 소임을 완수하는 것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대중성과 상업적 반향이라는 측면에서 &amp;lt;개밥바라기별&amp;gt;은 성공한 작품이다. 하지만, ‘대중적 성공’이 ‘문학적 성공’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amp;lt;개밥바라기별&amp;gt;은 찬사로만 환호할 수 없는 소설적 약점을 곳곳에 노출시키고 있다. 따라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작품의 찬란한 후광을 뒤로 한 채 문학적 의미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절실하다. &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lt;개밥바라기별&amp;gt;은 1960년대의 현실에 2000년대의 감각을 덧씌운 소설이다. 일종의 대중성을 의식한 전략적 글쓰기의 흔적이 소설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소설은 연재될 당시의 매체환경부터 특이했다. 2008년 2월부터 5개월간 포탈사이트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했고, 그 연재의 의도 또한 문학과 대중의 접촉면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연재되는 동안 하루 100～200개의 댓글이 달리고, 180만명의 네티즌이 블로그에 접속했다고도 한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인터넷 연재라는 매체환경의 변화가 소설의 서사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문체는 의도적으로 단문으로 끊어 쓴 흔적이 역력하다. 모니터로 읽어야 하는 인터넷 환경에 맞춰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의도적 변화이다. 게다가 소설의 전개도 끊임없는 사건의 연쇄를 중시하고, 성격화가 약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문학의 대표하는 작가라 할 지라도 인터넷 환경에서 글을 연재할 경우 기복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변화가 긍정적이지 않고, 소설의 완성도를 저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분명하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황석영은 ‘전혀 새로운 젊고 어린 독자들’을 위해 1960년대적 상황에 2000년대적 내면성을 입힘으로써, 쿨하면서도 낭만적인 색채만 강화했다. 시대의 풍경만 바뀌었을 뿐, 제도교육에 고통받는 ‘준과 인호의 상황’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편적이다. 사실, 이 보편성은 황석영이 1960년대적 상황을 약간 비틀어 놓음으로써 소설 속에서 얻어진 ‘만들어진 보편성’이기도 하다. 2000년대 젊은 독자를 위한 황석영의 대중적 배려가 1960년대의 시대적 풍경을 ‘내면적 주체의 갈등’으로 치환해 버린 것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바로 이 부분 때문에 &amp;lt;개밥바라기별&amp;gt;은 표나게 ‘성장소설(Bildungsroman)’을 강조했다. 황석영은 1960년대와 2000년대 청(소)년들에게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자아의 내면 풍경’을 통해 ‘자유로운 영혼’은 어떻게 쟁취되는가를 보여주려 했다. 혹은 젊은 시절의 어두운 방황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삶의 긍정성을 발견해내려 했을 수도 있다. 소설 속 화자들은 1960년대와 갈등하거나, 좀더 극단적인 몇몇은 시대의 주류적 관점을 거부하고 일탈을 감행함으로써 자아를 찾으려 한다. &lt;/DIV&gt;
&lt;DIV&gt;&lt;br /&gt;이제는 좀더 나아가 냉정하게 황석영이 구현하려 했던 성장 소설이 어떤 성취에 가 닿았는가를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amp;lt;개밥바라기별&amp;gt;의 문학적 실패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성장소설은 ‘자기안의 닫힌 세계관’ 때문에 ‘자기 밖의 억압적 세계’와 불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 불화가 화해를 향한 여정인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자기 파멸이라는 매혹적인 결과로 치닫는 경우도 있다. 준․인호․정수가 예술에 대한 열정 때문에 제도교육과 불화하는 이유는 ‘강한 자의식이나 자기애’ 때문이다. 성장소설의 서사는 강한 자아가 세계와 새롭게 관계 맺게 되는 과정을 ‘균열 - 대립 - 통합(조정)’ 순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자아와 세계 사이의 극한적 대립 속에서 주체는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세계를 변화시키면서 ‘자아의 성장’을 이끌어낸다. 즉, 성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내면과 주체 밖 세계 사이의 조율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소설은 회고담이 아니며, 내면에 대한 진술도 아니고, 역사에 관한 사실적 재현은 더더욱 아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성장소설과 자기 드러내기&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 소설은 1960년대를 배경으로 10대들의 방황을 그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황석영이 겪었던 1960년대를 소설적으로 회고하는 ‘자기 드러내기’이다. 그런데도, 황석영 스스로 &amp;lt;개밥바라기별&amp;gt;을 한국적 성장소설의 등장이라 주장한 바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2000년에 정리된 ‘황석영 연보’(&amp;lt;황석영 중단편전집&amp;gt;)와 거의 그대로 겹쳐지고 있으며, 황석영 자신도 준의 형상을 통해 “이 작품을 쓰면서 주변으로 밀려났던 나의 청춘시절을, 단편소설을 쓰던 때의 나를 비로소 되돌아볼 수 있었다”(285쪽)고 토로했다. 이렇다 보니, 소설의 서사가 정교하게 구상된 극적 요소에 의해 절제되기 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내맡겨진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성장소설은 시간의 흐름과 갈등하는 내면의 성장이라고 했을 때, 이러한 연대기적 서술은 안이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베트남 파병을 앞둔 준의 회상이 소설의 처음과 끝을 감싸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장황하게 이어지는 준․인호․정수의 무전 여행 등은 여정 보여주기에 급급해 낭만적 치기로 채색되어 있다. 이는 황석영이 자신의 과거와 거리두기에 실패해 ‘기억의 기록’에 급급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자기객관화에 실패한 ‘회고담’이 됨으로써,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 탐구에도 미치지 못하고 만 것이다. &amp;nbsp;&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게다가 이 소설에는 당혹스러운 해설자의 개입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소설의 구성상으로는 ‘특박 나온 준’이 과거를 과장하는 서사의 주체여야 한다. 하지만, 소설 텍스트 속에는 노년의 황석영이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목소리가 곳곳에 등장한다. 예를 들면,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라진 내 젊은 날의 인생에 대한 예감이었을 것이다”(101쪽)라거나, 좀더 노골적으로는 “나는 나중에 베트남에 가서 산과 바다의 아름다운 경치가 얼마나 밋밋하고 의미가 없는지 알게 되었다”(175쪽)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쨌든 내가 그때의 그 모퉁이에서 삐끗, 했던 것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필연이었다”(186쪽)라고 사후적으로 진술한다. 세 부분의 시간이 소설 속에 혼재함으로써, 독자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이러한 소설적 진술은 치명적 약점이다. 이는 황석영이 &amp;lt;개밥바라기별&amp;gt;의 서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준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부분에서 유독 회상조의 정조가 강하게 드러나며, 작가의 직접적 해설도 준의 장에서만 빈번하다. 심지어는 ‘고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 규칙’이 1970년에야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 “나두 학교 때려치우구 검정고시나 볼까봐”(163쪽)라는 대화가 등장하는 것은 작가의 불성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러한 진술의 혼란은 소설 속 화자와 작가의 목소리가 겹쳐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황석영이 『개밥바라기별』을 창작하면서 무의식 중에 자신의 1960년대와 준의 상황을 중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amp;lt;개밥바라기별&amp;gt;이 과거를 회고하는 작가의 자의식이 투영된 ‘기억의 서사’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작가의 준의 거리두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혼란이 발생해 소설의 미적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서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준에 비해 영길․인호․상진․정수․선이․미아는 조력자에 머물고 있다는 점도 아쉽기만 하다. 준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은 세계의 일부이면서 준의 일부이기도 하다. 준의 성장은 바로 이들로부터 촉발될 수 있고, 이들과의 성격적 갈등 속에서 구체화될 수 있다. 그런데도, 인호․정수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사건에 대한 부가적 진술자이거나, 성격화가 덜 된 풍경적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amp;lt;개밥바라기별&amp;gt;은 이야기성과 사건은 풍부하지만, 작품적 완성도는 떨어지는 작품으로 전락했다.&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황석영의 ‘중박’과 문학상업주의&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황석영은 부끄러움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는 &amp;lt;개밥바라기별&amp;gt;을 출간하면서 “외국에는 여러 작가들의 수많은 성장소설이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 문학사에는 단편소설 몇 편이 있을 정도다”(283쪽)라고 개탄했다. 이는 이 소설이 한국문학사에 남을 장편 성장소설이라고 스스로 웅변하는 것과 같다. 황석영의 진술은 한국문학사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던 윤흥길의 &amp;lt;장마&amp;gt;(1973), 김원일의 &amp;lt;노을&amp;gt;(1977), 이문열의 &amp;lt;젊은 날의 초상&amp;gt;(1981), 은희경의 &amp;lt;새의 선물&amp;gt;(1995), 현기영의 &amp;lt;지상의 숟가락 하나&amp;gt;(1999), 그리고 심윤경의 &amp;lt;나의 아름다운 정원&amp;gt;(2002) 등과 같은 장편 성장소설에 대한 존중의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과거를 부정하려는 무의식적 태도에서 공공연하게 읽을 수 있다. 스스로 기원이 되고자 하는 자는 ‘역사와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권력이 되고자 하는’ 감성의 소유자이기 쉽다.&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더군다나 황석영은 회고담류의 이야기를 극적 긴장에 대한 고려도 없이 소설화해 ‘상업주의적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 내몰리고 있다. 그는 ‘젊고 어린 독자들’과 소통한다는 명분 아래 ‘대중성에 포박된 작품’을 ‘문학적 성취’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나의 문학적 연대기의 새로운 표지석’이라는 이름표까지 달아 기념하려 하고 있다. 또한, 10만명을 넘어섰다는 판매량에 열광해 ‘중박’(문학성과 대중성의 중간, 대박에 못 미치는 중박)이라는 비루한 용어까지 만들어 자신감을 과도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대중적 성공이 문학적 성공을 보증하지 않는다. 앞에서 지적한 &amp;lt;개밥바라기별&amp;gt;의 소설적 약점은 황석영의 문학세계가 태작을 생산하는 노쇠화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작가가 자신의 작가론에 대한 주석서의 역할을 할 회고담류의 작품을 생산하게 되면, 그 작가의 창작적 역량은 고갈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조종(弔鐘)을 스스로 울리고 있다.&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런 의미에서 &amp;lt;개밥바라기별&amp;gt;보다는 그의 등단작인 「입석부근」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입석부근」은 답답할 정도로 촘촘한 태도로 세계와 대결하며, 자아의 성장이 어떤 대결적 태도 속에서 쟁취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야성을 갈무리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청년 황석영은 “모든 사랑은 밖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으로 파고들어가서 직접 그것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에서부터 출발한다”고 갈파했다. 바라보지만 않고, 먼저 다가서서 몸을 섞음으로써 ‘이웃들의 삶의 진실’을 배우려는 연대의 태도가 청년 황석영에게는 있었다. 1960년대의 청년 황석영은 소설화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의 황석영이 되돌아 보아야할 ‘부끄러움을 비추는 거울’이다. 모든 과거는 그리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주체를 구성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문득, 황석영의 젊음이 애절하게 그립다. &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gt;&amp;nbsp;&lt;/DIV&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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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개밥바라기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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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황석영신화</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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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6 Nov 2008 14:27:3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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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힘을 모으는 방법: 거국내각과 촛불(이영제)</title>
			<link>http://jihaeng.net/blog/127</link>
			<description>&lt;DIV&gt;&lt;FONT size=2&gt;* 편집자주: 진보개혁정치세력의 위기의 요인은 국민들의 신뢰상실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 있어 왔습니다. 따라서 진보개혁정치세력이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되찾는 것은 당연히 국민신뢰의 회복에서 우선 찾아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039;촛불 이후&#039; 진보개혁정치세력들은 또다시 신뢰회복보다는 정권에 대한 반대에서 길을 찾고 있는 듯 보입니다. 설사 그것이 신뢰회복을 위한 또 한번의 민주화 투쟁에의 역사적 헌신이라는&amp;nbsp; 이름을 달고 있다 해도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입니다. 국민들이 진보개혁정치세력에게 무엇가를 원하고 있는지조차 확실치 않지만, 혹시 원하는 것이 있다해도 그것은 정권반대운동이 아니라, 서민경제회복을 위한 구체적 대안의 제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안의 실현은 결코 정권과의 싸움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정권이 더욱 잘할 수 있도록 거국적 협력의 &#039;불가피성&#039;을 수용케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amp;nbsp;이번 이영제 연구위원의 정치사회비평은 이런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토론을 기대합니다. &lt;/DIV&gt;
&lt;DIV align=left&gt;-----------------------------------------------------------------------------------------------&lt;br /&gt;&lt;/DIV&gt;
&lt;DIV align=center&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STRONG&gt;힘을 모으는 방법: 거국내각과 촛불&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이영제&lt;/DIV&gt;
&lt;DIV align=center&gt;(대안지식연구회)&lt;/DIV&gt;
&lt;DIV&gt;&lt;br /&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어디로 힘을 모을 것인가?&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가중을 더해가는 경제위기에 비례하여 개각에 대한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촛불 정신 계승을 표방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민생민주국민회의(준)은 “경제와 민생,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이 유린당하는 총체적 위기, 국가적 비상시국”을 맞아 “이명박 정권에 비판적인 모든 세력의 연대와 국민의 결집”을 호소하고 “거국민생내각 구성”을 요구하였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구정권 인사라도 능력에 따라 인사를 해야 한다”는 발언에 이어 원내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정부여당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정부여당을 믿고 힘을 보태줄 것을 요구하면서, 정부를 중심으로 “정쟁을 중단하고 함께 손을 잡고 위기의 파고를 넘어서자”고 주장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양자는 이명박 정부를 반대하는 방향과 이명박 정부에 협조하는 방향이라는 상반된 방향으로 국민의 힘을 모으자는 데에서 양 극단에 서 있다. 그러나 공히 국가 위기상황임을 공유하고 그 해결책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양자의 공통점은 여기에서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가는데, 비록 그 범위와 대상이 상이할지라도 특정 정치세력이 독식하고 있는 현행 내각을 ‘거국내각’ 형식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lt;STRONG&gt;국가위험과 책임의 분담&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국민들의 인내와 협조로 시작하고 있는 홍준표 대표의 발언은 그 초점이 제도 정치권에 맞추어져 있다. ‘문맥상’ 민생민주국민회의의 주장보다 홍준표 원내대표의 주장이 훨씬 덜 불편하다. 그 이유는 홍준표 원내대표가 예를 든 구 정권인사들의 코드와 현 정권의 코드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주장과 대안이 구체적일뿐만 아니라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홍준표 원내대표의 구정권 인사 등용 또는 ‘여야정 정책협의회’ 방식의 ‘거국내각’은 국민들의 개각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인사난을 해소하고 초정파적 정치라는 명분을 통해 야당을 압박하는 한편 효율적인 국민 동원을 도모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구정권 또는 모든 정치세력들과의 책임의 분담 내지는 공동책임을 통해 실패에 따른 위험의 분산과 성공에 따른 보수의 증대를 예상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홍준표 원내대표의 주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그토록 꿈꾸던 대연정의 연장선에 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039;거국민생내각’의 어색함&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반면 민생민주국민회의는 ‘거국민생내각’보다는 이명박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의 연대와 국민의 결집을 주된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반대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 하나 명확한 것이 없고 그나마 현 내각의 즉각적인 총사퇴와 ‘거국민생내각’ 구성이 가장 구체적인 주장이라는 사실은 출범선언문을 읽는 이들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우선 ‘민생민주국민회의’가 무엇인지부터가 모호한데 그것이 촛불인지 아니면 ‘거국민생내각’에 참여할 대안조직인지, 촛불이 대안인지, 아니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대안인지, 대안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등 어느 것 하나 명확한 것이 없다. 다음으로 출범 선언문에서 유일한 요구인 ‘거국민생내각’을 어떻게 구성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물론 내각은 총리의 제청 하에 대통령이 임명하기 때문에 그 책임은 민생민주국민회의가 아니라 집권세력에게 있다. 그렇지만 유일한 대안이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는 모든 세력이 결집하는 것’이라는 것은 무언가 알맹이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lt;STRONG&gt;돌맹이 던질 사람보다 박수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거국내각 참여 제안을 받는다면 흔쾌히 참여할 수 있는 진보인사는 과연 있는가? 거국민생내각에 민생민주국민회의는 참여할 것인가?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거국민생내각은 홍준표 원내대표가 이야기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정치세력이 싸우지 말고 민생을 위해 힘을 합치는 것이다. 이것은 정쟁의 중단과 타협을 의미하기도 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시급한 것은 이명박 정권에게 돌맹이를 던질 사람을 한사람이라도 더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의 박수라도 더 받을 수 있는 그런 대안 내지는 대안세력을 만드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반대하는 것만으로 박수 받는 그런 시대는 지났다. 이명박 정권의 반대편에 위치한 정치세력들 역시도 박수를 받으려면 무엇보다 일단 촛불을 계승한 ‘민생민주국민회의’로 결집하라는 모호하고 무책임한 주장에서 벗어나 자신을 주장과 대안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lt;/DIV&gt;&lt;/FONT&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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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거국민생내각</category>
			<category>민생민주국민회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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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타협</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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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30 Oct 2008 15:05:1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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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오늘의 상황과 지(知)의 변혁 문제(이명원)</title>
			<link>http://jihaeng.net/blog/126</link>
			<description>&lt;br /&gt;
&lt;DIV align=center&gt;&lt;STRONG&gt;&lt;FONT size=3&gt;오늘의 상황과 지(知)의 변혁 문제&lt;/FONT&gt;&lt;/STRONG&gt;&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br /&gt;&lt;br /&gt;&lt;/FONT&gt;&amp;nbsp;&lt;/DIV&gt;&lt;FONT size=2&gt;
&lt;DIV align=center&gt;이명원&lt;/DIV&gt;
&lt;DIV align=center&gt;(대안지식연구회)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미국발 금융위기 상황을 일시적인 사태로 볼지, 아니면 자본주의의 체제 차원에서의 구조변동으로 볼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이 중요한 문제가 근본적으로 사유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동시에 요동치는 한국의 정치경제학적 위기상황에 대한 사유 역시, 앞에서 제기한 문제를 토대로 진지하게 사유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칭 ‘리만 브라더스(이명박․강만수의 희비극적 통치를 일컫는 조어)’의 무능 때문에, 작금의 한국사회의 위기가 증폭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 판단에 이들이 한국사의 전개에서 맡고 있는 배역은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는 극장의 전체 구조를 고려하면, ‘소도구’에 비견할 만한 상징적 중요성조차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별다른 오디션을 거치지 않았거나, 이미 한 번의 오디션에서 실패한 배우를 무대에 등용시킨 ‘보이지 않는 연출자’의 입장에서는 역시 통탄할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을 어렵게하는 것들&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오늘의 금융위기 상황은 사실 ‘구조적인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일찍이 산업자본주의를 검토하면서 예견한 ‘주기적인 공황’과 닮아 있지만 내용은 판이하다. 적어도 마르크스가 목격했던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대에는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충당할 ‘외부’란 것이 있었다. 대체로 농업 국가였던 아시아․아프리카가 대거 식민지로 편입됨으로써, 이 ‘외부’는 세계자본주의의 성장의 토대로써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연히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하고, 이들에 의해 작동했던 자본주의 체제는 당연히 안정성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러나 착취경제에 의존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개척’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는 위기로 빠져들고, 그것이 히스테릭한 형태로 분출된 것이 대공황이며, 공황의 탈출구로 선택된 것이 제국주의 국가 상호 간의 전쟁인 세계대전으로 비화된다. 전쟁이 끝난 후 식민지였던 아시아․아프리카들은 독립하게 되지만, 이들의 정치적인 독립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단계에서 성립된 자본주의 체제의 ‘비대칭적인’ 메커니즘은 종주국과 구식민지 사이에서 변함없이 관철된다. 물론 1945년에서 1989년에 이르는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권의 출현은 표면적으로는 서구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전혀 이질적인 형태를 띤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이 역시 국가가 시장의 역할을 대리한 ‘자본주의’라는 점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의 글로벌화는 변함없이 추구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원료와 노동력, 국경과 화폐의 ‘낙차’를 통한 이윤의 확보가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을 가능케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역에 필요한 ‘공간의 낙차’가 필수적인데, 1989년 이후 글로벌화한 자본주의는 그것을 가능케 할 ‘공간적 외부’를 상실함으로써(WTO나 FTA 등을 통한 관세장벽의 철폐), 극단적으로 ‘시간의 낙차’에 의존하는 세계화된 금융시장을 통해, 이윤을 확대하고자 하는 체제 유지전략이 고안되었던 것이다.&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국가 간 ‘공간의 낙차’에 의존한 경제는 실물경제이며, ‘시간의 낙차’에 의존한 그것은 금융경제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가 완숙기에 이른 오늘의 현실에서 실물과 금융 모두 체제 유지의 확실성을 찾아볼 길은 어디에도 없다. 실물경제의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값싼 ‘노동력’을 찾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세계시장이라는 장 안에서만 가동될 수 있는데, 세계시장이 갈수록 ‘균질화’함에 따라 노동에 따르는 ‘인건비’가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환경에 직면하게 된다. 그 단적인 예가 지금도 저임의 노동력의 기반이 되고 있는 중국 노동시장의 변화다. 개혁개방 이후 전지구적으로 진행된 기업의 대중국 투자란 결국 신규시장의 확보와 저임 노동력 확보에 대한 기업의 기대감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산업화가 일정한 단계에 이르자, 필연적으로 ‘노동정의’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고 이에 따라 임금상승 압력이 당연히 높아진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다음으로 언급되어야 할 것은 과거에는 ‘비용’으로 고려되지 않았던 요소에 대한 가격반영의 압력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예가 ‘이산화탄소 배출규제’를 둘러싼 이른바 ‘탄소경제’와 같은 개념의 부상이다. 산업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에서는 모든 ‘환경비용’ 등에 대한 기업의 책임이 고려되지 않았다. 이것이 ‘비용의 외부화’라고 하는 경제학의 개념이다. 그러나 오늘의 글로벌화된 생태 위기상황은 국가와 기업으로 하여금 ‘비용의 내부화’를 강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물론 미국과 같은 일부 국가가 ‘교토의정서’에 동의하지 않는 등 저항은 거세지만, 그러한 고집의 결과란 결국 자본주의 체제는 물론이고 지구적 생존 자체를 파괴적으로 침식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무모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동시에 각각의 개별국가들은 자국 내에서의 민주주의의 진전과 국민들의 기대수준의 상승 때문에, 교육과 의료, 복지와 같은 부문에 대한 조세의 ‘재분배 압력’이 높아지게 된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부문에 대한 타격을 가하는 방향으로 국가의 경제노선을 이끌고 가고 있지만, 이러한 ‘국가의 부도덕한 정책’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존재근거 자체에 대한 국민들의 회의를 낳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에 대한 부정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국가는 설사 그것이 자신의 동맹적 파트너인 시장 부문의 강력한 저항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타협적 복지정책 및 조세의 ‘재분배’를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작금의 실물경제 부문에서의 내수부진의 구조화는 인간노동을 천연덕스럽게 비용으로만 사유하는 기업의 싸늘한 계산과 재분배 기능을 삭제시키는 국가에 대한 대중들의 불가피한 저항이기도 하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화석연료의 급진적인 고갈현상은 오늘의 상황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기요인의 상수다. 지금이야 세계경제 위기에 대한 심리적인 저항 때문에 석유를 포함한 화석연료의 가격이 등락을 거듭하고 있으나, 적어도 한 세기 이내에 그것이 일정하게 피크에 도달한 후 생산량이 급격하게 감소할 수밖에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 결과는 당연히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는 세계경제의 동반몰락 또는 아노미를 초래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바이요 경제체제의 가능성을 탐문하고 있기도 하지만, 곡물가 파동에서 확인했듯 산업구조 재편에 따르는 막대한 비용을 생각해 보면, 미래의 불확실성은 해소될 가능성이 희박하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러한 사실과 함께, 실물경제 또는 물질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가능케 했던 지구인들의 ‘노동’에 대한 인식 변화 역시 자본주의를 위기에 빠지게 하는 요소다. 오늘의 노동자들은 초기 산업자본의 축적을 가능케 했던 ‘금욕적 노동윤리’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다. 실물경제 부문에서의 노동보다는 ‘증권’과 ‘부동산’을 포함한 카지노에 유사한 ‘우연성(운명)의 투기’에 이들이 더욱 애착을 보이는 이유는, 실물경제 안에서의 노동의 결과가 그의 미래전망을 낙관적인 방향으로 진전시킬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불가피한 노동윤리의 변화다. 그런데 이 ‘우연성의 투기’란 비물질 경제 영역의 근본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초기산업자본주의는 ‘공간의 낙차’ 아래서 상품 교환을 ‘관세’의 형태로 방어할 수 있었지만, 오늘의 정보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시간’을 장악해야 하는데, 이것을 지구화된 수준에서 컨트롤한 ‘보이지 않는 손’은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거의 악무한적인 실시간대의 글로벌한 교환을 통해서 지탱되던 금융자본주의는 한번 붕괴하면, 연쇄적으로 그 뿌리까지 붕괴시킨 후에야 멈출 수 있는 것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자본주의 체제의 &#039;밖&#039;에 대해 상상하는 지식의 변혁 필요&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러한 장기국면에서의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해서는 일찍이 월러스틴이 &#039;세계체제론&#039;등을 통해 제기한 바 있으며, 한국에서는 문학비평가 김종철이 [녹색평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경고해 온 바 있다. 그러나 해법의 차원에서 두 사람의 태도는 상이하다. 월러스틴은 향후 진행될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상황은 짧게는 50년에서 길게는 100년 정도 진행될 것으로 예측하는데, 이 시기가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고통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매우 험난한 시기가 될 것이라는 묵시록적 주장을 펼치는 데 멈춰 있다. 이에 반해, 김종철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지탱하는 ‘화폐경제’의 폐해로부터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벗어나 ‘농적 순환사회’를 모토로 한 자립과 자치의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풀뿌리민중들이 주체적으로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런 진단이 묵시록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묵시록적 위기에 처한 것은 현단계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고, 이 체제가 초래할 고통의 대부분은 체제의 꼭지점에 있는 지배계층들이 아니라 ‘풀뿌리 민중들’이 짊어지게 되어 있다. 이런 사정이라면 역시 중요한 것은 파상적인 고통에 직면할 가능성이 분명한 민중들 그 자신이, 체제가 우리에게 던지는 달콤한 약속들에 대한 거부를 인식과 실천의 양 측면에서 분명히 하는 데에 있다. 가령 경제발전만이 살 길인데, 이를 위해서는 알 수 없는 무한 경쟁체제와 승자독식구조에 순응해야 하며, 특히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국민들이 자발적인 ‘고통분담’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에 더 이상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위기에 빠진 것은 민중들 그 자신일 터인데, 과거에도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세계의 국가들은 기업을 살려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말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등장하는 국가의 위기관리 체제를 보면, 국가는 시장과의 동맹적 파트너이지 풀뿌리 민중들의 보호자가 아닌 것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이런 구조적 체제 변화기에는 ‘지(知)의 변혁’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구조적인 차원에서의 세계사적 변화는 언제나 지(知)의 변혁을 초래해왔다. 오늘의 세계사적 지식생산 양식의 근거는 근대 자본제 질서에 부응하여 성립된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체계화된 철학에서의 진, 선, 미 영역의 완전한 분화는 통치방식에 있어서의 관료제의 전문화와 인문적 지식인의 추방, 테크노크라트의 부상이라는 지식과 지식인의 분화형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동시에 대학을 포함한 학문영역에서 성립된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분기와 같은 분과학문 체제의 구조화는, 학문 자체의 내재적 탐구욕보다는 체제유지와 관련된 실용학문, 더 정확하게는 체제유지학문으로서의 성격이 확고하게 강화되었음도 부정하기 힘들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냉전기를 거치면서 대학에서의 지식생산은 국가의 압력에 빈번하게 노출되었지만, 냉전 이후 절대자본주의(신자유주의)가 고조되면서 그것은 다시 시장 부문의 노예적 상태로 빠른 속도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한국대학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대학의 학부교육은 좋게 말하면 ‘국민교육’, 냉정하게 말하면 ‘직업훈련교육’으로 격하되었으며, 대학의 구성원이라 할 수 있는 학생과 교수, 그리고 교원 축에도 끼지 못하는 박사급 시간강사들은 그 지위와 현재적 상황은 다르지만, 지식생산에 따르는 학문의 내적 희열과는 무관한 ‘기능적 지식’의 생산압력에 가감 없이 노출되고 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그 위기가 가령 1997년의 IMF 사태와 같은 경제적인 수준에서 날카롭게 노출될 때마다, 혹은 이른바 ‘87년 체제론’과 같은 민주주의의 위기가 가감 없이 노출돌 때마다, 한국의 지식사회에 던져지는 사회적 비판은 이런 것이다. 왜 지식인들은 임박한 경제위기를 경고하지 못했나. 왜 지식인들은 도래할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지 않았나 하는 저널리즘적 힐난이 그것이다.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들리겠지만, 이 힐난을 가볍게 무시할 권리가 지식인에겐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동시에 이러한 힐난이 단순히 지식인에 대한 폄훼라기보다는 도발적인 형태로 제기되기는 했지만, 진실의 유력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 나는 동의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식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가?&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나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지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체제적 지식인’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강화했고, 이 때문에 체제 내화된 지식생산의 카테고리 안에서 기능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요컨대 규범적인 성격으로 구조적인 변화를 이룬 근대적 지식생산의 ‘외부’가 소실됨으로써, 지식생산이 프로젝트로 불리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토가 구조화됨으로써, 지(知)의 해방적 또는 예언자적 기능이 대부분 거세되었다고 생각한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국가나 시장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知)의 생산방식은 결국 ‘고용된 지식’에 불과할 뿐, 지(知)의 변혁적 기초가 되어야 할 ‘비체제적 상상력’에 입각한 근본적 사유를 보여주지 못했다. 동시에 기능적․실용적 지식의 전사회적 환대는 근대적 지(知)의 출발점에서, 바람직하게 제기된 체제를 상대화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유혹이기도 했다. 근대이행기에 데카르트가 ‘이성’에 의해 ‘신’을 상대화했듯이, 조선후기의 실학자 박제가가 ‘한국어’를 통해 ‘중화주의’를 상대화했듯이, 방법적으로든 아니면 실천적으로든 스스로를 시스템의 ‘외부’에 위치시키는 일이 지(知)의 변혁적 기초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지(知)의 변혁적 시선전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조적 위기를 통해서만 존속할 수밖에 없는 자본제 경제체제의 ‘외부’를 상상하는 일이며, 그것이 공산주의건 사회주의건 간에 어쨌든 ‘국가’라고 하는 터미널을 통해서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발전론적 세계관’의 강력한 자장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는 일에 있지 않을까. 오히려 작금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국가나 시장, 세계체제의 구조적 압력에 대항하여 풀뿌리 민중들의 자율적 결사와 지속가능한 순환경제, 그리고 사람과 자연 모두가 조화적 공생을 이룰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이 아닐까.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동시에 우리는 인문정신을 포함하여 지(知)의 변혁에 있어 기초가 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합적 비전과 영감을 촉진하는 지적 태도를 확대하고, 지(知)의 변혁과정에서 체제와 결별함에 따라 파생될 경제적 안정성의 붕괴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풍요가 결코 보상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행복의 비가시적인 가치를 재확인하는 작업에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화폐체제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물신’의 무대에서 퇴장하여, 막 태어난 아이가 경이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듯이, 분노도 두려움도 없는 울음으로 세계를 껴안고 있듯이, 그렇게 말이다. &amp;nbsp; &amp;nbsp;&amp;nbsp; &lt;br /&gt;&amp;nbsp; &amp;nbsp; &lt;br /&gt;&lt;/DIV&gt;&lt;/FONT&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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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비체제 지식인</category>
			<category>이명원</category>
			<category>자본주의의 존속</category>
			<category>지의 변혁</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26</guid>
			<comments>http://jihaeng.net/blog/126#entry126comment</comments>
			<pubDate>Tue, 21 Oct 2008 17:00:59 +0900</pubDate>
		</item>
		<item>
			<title>금융위기와 지식인-1997년 경제위기를 다시 반추하며(김원)</title>
			<link>http://jihaeng.net/blog/125</link>
			<description>&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lt;STRONG&gt;금융위기와 지식인 - 1997년 경제위기를 다시 반추하며&lt;/STRONG&gt;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김 원&lt;/FONT&gt;&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대안지식연구회)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STRONG&gt;1997년 겨울, 나 &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1997년은 한국사회의 현재를 만든 ‘전환점’이었다. 30년간 한국 사회를 지탱해오던 발전주의 경제성장이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평생직장 소멸, 고용불안, 청년실업, 주식 투자 등의 말이 사회화되기 시작한 시점이 그 때였다. 그러나 역설적인 점은 1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경제성장을 강조하는 정치-사회세력이 집권을 하고 있고, 이 패러다임이 대중들의 의식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화-경제성장이라는 괴물이 여전히 배회하고 있는 셈이다.&amp;nbsp; &lt;/FONT&gt;&lt;/DIV&gt;&lt;FONT size=2&gt;
&lt;DIV&gt;&lt;br /&gt;10년 전 나를 되돌아보면, 미쳐 한국 사회의 거대한 변환을 피부와 몸으로 느끼지 못했던 ‘골방안의 예비연구자’였다. 연일 방송되는 경제위기, 국가부도 사태, 고용불안 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삶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강 건너 불구경’했다고 이야기한다면 솔직할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나는 1997년 외환위기가 나의 삶의 문제임을 깨달았다. 지진아도 보통 지진아가 아니었던 것이다. &lt;/DIV&gt;
&lt;DIV&gt;&lt;br /&gt;하지만 ‘과연 이것이 나만의 문제였을까’라고 자문해보면, 그렇지 않았다. 당시 사회과학자들 사이에는 유독 ‘신앙고백’이 많았다. ‘왜 경제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나’라든지 ‘한국 사회과학의 예측 능력의 결핍’ 등에 관한 내용이 유독 눈에 띄었다. 더불어 도대체 왜 경제위기가 도래했는지에 관한 수다한 원인 분석이 국내외에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인지 이제 97년은 부정할 수 없는 ‘경제위기’로 인식되고 있다. &lt;/DIV&gt;
&lt;DIV&gt;&lt;br /&gt;하지만 나는 문제가 예측능력과 이를 위한 개념적 도구의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97년 이후 거리와 지하철 등 도시 곳곳에 수많은 노숙자와 실업자들이 넘쳤다. 한때 지하철에 “IMF 한파로 ...”로 말을 시작해서 생계를 이어가려는 걸인이나 도산한 회사의 상품을 낮은 가격에 팔려고 얘를 쓰는 사람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식인들은 예측과 원인 분석에 앞서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성장주의-발전주의 패러다임의 종언 속에서 어떤 삶의 가치와 기준을 새로이 정립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지만 소수를 제외하고 닥쳐온 시장만능주의, 경쟁지상주의 논리를 인정한 상태 속에서 ‘반대’ 만이 외쳐졌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STRONG&gt;성장주의라는 난파선에서 뛰어내리기&lt;/STRONG&gt;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글로벌 금융위기는 이미 한국에 상륙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039;외환 수급에 큰 문제가 없다&#039;고 이야기하지만, 원·달러 환율이 며칠 동안 몇 백원 상승하는 상황은 흡사 11년 전 가을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단지 현 정권의 정책적 오류나 장관 교체 등의 차원은 아니다. 이는 전 세계적인 문제이자,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금융위기는 경제적 문제일 뿐만이 아니라, 도덕적·윤리적·정치철학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이제 신자유주의 하에서 다른 삶과 사유 방식을 토론하고 제시할 수 있는 장을 제시해야 한다. 다시 97년과 같이 전문가임을 앞세워서 위기의 원인, 진단 그리고 해법을 고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금융위기와 성장주의 발전 정략에 대한 제대로 대응이 결코 아니다.&lt;/FONT&gt;&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br /&gt;6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에는 근대화, 경제성장주의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세력이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생산력과 성장이 진보이자 변혁의 잠재적 가능성으로 여겨졌으며, 그런 인식 틀에서 벗어난 발언은 퇴영적 혹은 공상적이란 딱지를 붙였다. 그 사이에 대중들은 경제위기 10년을 경제성장의 실패라고 주장하는 시장주의 정치세력에게 ‘미덥지 않은 지지’를 보내주었다. 이제 나를 포함한 지식인들은 과거 스스로를 규정했던 단선적인 사회진보의 논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lt;/FONT&gt;&lt;/DIV&gt;&lt;FONT size=2&gt;
&lt;DIV&gt;&lt;br /&gt;벌써 금융위기는 현물경제에까지 파급을 미치고 있다. 현재 가계부채는 97년 수준보다 3배 이상 많으며, 향후 금리 상승, 시장에서 자금 부족, 중소기업의 도산, 고용불안, 급속한 가계부채 심화와 고금리 신용대출에 따른 신용불량자 양산이 예측된다. 이것은 97년 이후 이야기되던 ‘양극화’ 차원이 아니라, 삶과 미래에 대한 ‘총체적 불안 심리’로 가속화되고 있다. 잇달은 자살, 불안정노동자의 확대, 교육전쟁이라 불리는 악무한의 시스템, 심리적 불안감을 타인에 대한 가해로 일시적으로 해결하려는 흐름들, 이처럼 벼랑 끝으로 몰린 공황기의 대중들은 다시 ‘잠재적 안정’이란 품에 안기기 위해 ‘경제성장을 통한 사회통합’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줄 수도 있다. &lt;/DIV&gt;
&lt;DIV&gt;&lt;br /&gt;하지만 또 다른 시나리오도 있다. 촛불시위와 각종 저항에서 보여준 대중들과 불안정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한국 사회가 역동성이 존재하는 ‘강점’이 있는 사회라는 것을 드러내어 준다. 나는 올해 어느 자리에서 ‘5년간 촛불이 밝혀질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특히 앞으로 그 계기는 촛불과 같이 우발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폭발인 동시에, 기존 운동 조직이 아닌, 새로운 집단에 의해 폭발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후 몰아닥칠 금융위기와 그 파급은 대중들에게 97년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장과 경쟁, 성장논리에 맞서, 시장과 경쟁의 시녀가 되라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과 불복종 형태의 분출과 현재 성장주의 시스템이란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려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흐름이 과거보다 급속히 확장될 것이다. &amp;nbsp; &lt;br /&gt;&amp;nbsp; &lt;br /&gt;&lt;STRONG&gt;뒷북을 칠 것이 아니라 당장 준비하자 &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FONT&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그렇다면 우리는 난파선이 가라앉을 때까지 팔짱을 끼고 기다리면 되는가? 자본주의 자동붕괴론에 근거한 대기주의란 세기 초 망령을 반복하자는 말은 아니다. 나는 이후 급속히 확산될 불안과 균절 속에서 현재 시스템 하에서 더 이상 인내하기 어려운 새로운 주체들 - 예를 들어 불안정노동자, 실업자, 청년, 여성 등 - 이 자신의 언어로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할 수 있는 준비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들이 당장 노조 조합원이나 사회운동의 회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의미 있는 조직 률 수치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불안이 불만과 저항으로 솟구칠 때, 우리는 다시 촛불 뒤만 쫓으며 헤메서는 안 되지 않을까? &lt;/FONT&gt;&lt;/DIV&gt;&lt;FONT size=2&gt;
&lt;DIV&gt;&lt;br /&gt;나는 그런 의미에서 지식인들이 대중운동과 그들 속에서 미래를 만들어낼 준비를 자신이 존재하는 ‘지역’에서 같이 토론하고 행동하는 것으로부터 찾아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비록 문법은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을 가진 개인과 집단의 ‘국지적이고 지역적 행동’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시 한꺼번에 비틀린 사회 전체를 뒤엎을 수 있다고 사고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교만함의 소산일 것이다. &lt;br /&gt;이반 일리치는 오늘날 민중이 평화를 되찾으려면 무엇보다도 자립적이며 자치적 삶의 기반을 뿌리로부터 파괴하는 경제발전의 논리를 배격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금융위기를 이미 겪고 있는 한국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제 지식인의 현장으로 가서 준비하는 일이 남았다. &lt;/FONT&gt;&lt;/DIV&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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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대항과 불복종&#039;</category>
			<category>성장주의</category>
			<category>외환위기</category>
			<category>자치</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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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9 Oct 2008 17:32:01 +0900</pubDate>
		</item>
		<item>
			<title>국방부의 과잉충성과 통치전략 누출(이승원)</title>
			<link>http://jihaeng.net/blog/124</link>
			<description>&lt;DIV align=center&gt;&lt;STRONG&gt;국방부의 과잉충성과 통치전략 누출&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lt;FONT size=2&gt;
&lt;DIV align=center&gt;&lt;br /&gt;&lt;br /&gt;이 승 원 &lt;/DIV&gt;
&lt;DIV align=center&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원)&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039;반공국가&#039; 재건을 꿈꾸며&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얼마 전 국방부의 과잉충성이 이명박 정부의 통치전략을 드러내고 말았다. 충성으로 치자면 야 포상감이지만, 전략누출이라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하는 웃지 못 할 일이다. 통치전략이 새로울 건 없었다. &#039;민주주의&#039;라는 불편한 가치를 뒤로한 채 &#039;좌우&#039;대립이라는 깔끔한 구도 속에서 강력한 &#039;반공주의 국가&#039;를 재건하는 것이다. 국방부의 고교 근현대사 교과서 개정 요구안은 여기저기서 &#039;독재로의 회귀&#039; 혹은 &#039;새로운 파시즘&#039;이라는 비판 속에서 이명박 정부가 조심스레 진행하는 &#039;반공국가 재건&#039;이라는 본색을 너무 빨리 드러내 버린 과잉충성의 결과였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명박 정권이 경외하는 박정희 독재정권에서 &#039;반공주의&#039;는 &#039;빨갱이&#039;의 적화야욕에 맞서는 강력한 &#039;안보논리&#039;였으며, &#039;경제자립&#039;을 위한 국민동원의 이유였다. &#039;안보&#039;와 &#039;경제자립&#039;은 미완의 4월 혁명이 꿈꾸던 &#039;민주주의&#039;의 실현을 위한 토대로 설파되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039;반공주의&#039;는 &#039;민주질서확립&#039;을 위한 전가의 보도가 되었으며, 쓸데없이 &#039;평화통일&#039;이나 &#039;근로기준법 준수&#039;를 외치는 자들은 부지기수 민주질서 전복기도의 &#039;빨갱이&#039;가 되어 감옥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만큼 박정희에게 통치는 간편했고, 이역만리 또 다른 독재자들은 박정희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강력한 반공주의적 통치가 어디 한 방울의 피땀도 없이 만들어졌으랴.&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lt;STRONG&gt;&#039;영어몰입교육&#039;의 기원과 &#039;반공주의&#039; &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1945년 해방 직후 소위 &#039;우익&#039;의 모습은 초라했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도 &#039;I can speak English&#039;였다. 일제 강점기 있는 집 자제로서 &#039;영어&#039;정도는 기본이었던 일부 우익들은 해방 되던 해 9월 초 서울을 점령한 미군정의 통역역할을 자임하면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지금의 영어몰입교육의 필요성은 아마도 선친들의 그러한 경험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039;건국준비위원회&#039;, &#039;조선인민공화국&#039;, &#039;인민위원회&#039; 등의 조직을 통해 대중의 신뢰를 얻고 있었던 좌익에 맞서 우익들은 &#039;English&#039;를 무기로 미군정 하에서 일제 강점기 경찰조직을 부활시켰고, 여러 &#039;청년단&#039;들을 조직하면서 역전의 시기를 넘보고 있었다. 미군정의 한반도 점령 제1목적은 극동지역으로 팽창하는 소련의 제지였고, &#039;반공주의&#039;는 그 핵심 노선이었다. 1945년 겨울 반탁운동을 틈타 이승만은 적극적으로 반공주의를 남한에 설파하기 시작했고, 좌익에 기죽어있던 우익들은 &#039;반공주의&#039;로 미군정과 하나가 되면서 그들의 날을 꿈꾸고 있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을 거치면서 좌우익의 힘은 역전되었다. 좌익의 나이브함에 대한 논의는 뒤로 하자. 그 해 가을의 패배는 좌익을 &#039;지하&#039;로 들여보냈고, 행복했던 인민위원회들은 강제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 뿐이랴, 한국전쟁이 대한민국 국군을 최대의 국가조직으로 키운 것처럼, 9월의 봉기는 역설적으로 악랄했던 일제 하 경찰조직을 성공적으로 재기시켰다. &lt;br /&gt;&amp;nbsp; &amp;nbsp; &lt;br /&gt;1946년의 가을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미군정은 경찰을 앞세워 좌익 활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과 체포에 들어갔다. 소위 &#039;좌익숙청(Red Purge)&#039;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군정은 방송국, 통신부, 교통부, 교도소, 소방서 등 공공기관에서 1947년 여름부터 약 10개월 동안 1300여명을 좌익 활동이라는 죄명으로 체포하였고 2년 만에 남한을 강력한 반공주의적 질서로 구축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제주에서는 국군과 청년단의 좌익 토벌작전에 인구의 3분의 1가량이 희생당하는 비극이 시작되었고, 8월에는 반공주의를 한국에 최초로 도입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12월에는 &#039;국가보안법&#039;이 제정되었다. &amp;nbsp;&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lt;STRONG&gt;세련된 반공주의로의 회귀&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60년이 흘러 이명박 정권은 우익이 초라했던 1945년의 해방의 기억을 지우고, 우익이 승리의 깃발을 올린 1948년을 기념하는 &#039;건국 60주년&#039;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가을항쟁 이후의 좌파숙청처럼, 촛불집회 진압에 성공한 이명박 정권은 KBS, YTN 등 언론사 통제는 물론 &#039;학술진흥재단&#039;과 &#039;과학재단&#039;을 통합하면서 지식인 길들이기에 나서고 있다. 촛불집회로 정권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경찰은 현재 &#039;신종 도박&#039;과 &#039;성매매&#039; 단속으로 몸을 풀면서 시민들 위에서 군림하기 시작했다. &#039;노래방 도우미 간첩사건&#039;, &#039;오세철 교수 이적단체 사건&#039; 등은 &#039;똘이장군&#039;식의 &#039;반공주의 통치&#039;가 21세기에도 통하는지를 점검하는 소박한 실험에 불과했다. 10년 이상의 장기집권을 위한 교두보인 4년 후의 대선과 총선에서의 제2의 승리를 위해 이명박 정권은 &#039;과거로의 세련된 회귀&#039;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4년 후의 새로운 유권자들을 &#039;친이명박 세력&#039;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 가장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프로그램은 바로 &#039;교과서 위주&#039;의 학습이다. &#039;영어몰입교육&#039;은 과거 우익과 미군정이 그러했듯이 미래 &#039;한미동맹&#039;의 초석이 될 것이고, 소위 &#039;좌편향 역사교과서&#039; 개정은 전쟁경험이 없는 미래의 유권자들의 정치적 선택을 사전에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조심스러워야 했다. 선거를 통해 집권한 이명박 정부에게 &#039;민주주의&#039;라는 가치는 여전히 불편한 입안의 가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의 과잉 충성은 이명박 정권의 &#039;과거로의 세련된 회귀&#039;를 &#039;촌스럽게&#039; 만들어버렸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알아서 전교조를 뭉개버리고, 우익 시민세력들이 알아서 역사교과서를 개정하고, 상류층 유권자들이 알아서 영어몰입교육 바람을 일으키면 4년 후 재집권은 손안대고 코풀 수 있는 것인데, 국방부의 이명박 정권 통치전략 누출사건은 결국 이명박과 우익세력들이 꿈꾸는 이상형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희대의 독재자들이었다는 것을 고백해버린 것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知彼知己百戰不殆와 &#039;전가의 보도(傳家의 寶刀)&#039; 찾기&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역사는 되풀이 된다지만, 이 경우 역사는 반만 되풀이 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039;세련된 반공주의&#039;로 흩어진 우익들을 총결집시키고 있는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터넷으로 들어가 버렸고, 민주당은 &#039;민주주의와 개혁&#039;보다는 &#039;나이와 연륜&#039;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고, 민주노동당은 여전히 자신들의 &#039;신비한&#039; 세계에 갇혀있고, &#039;진보신당&#039;은 계급의식 없는 계급에 둘러싸여있다. 대학교수들은 대기업 노조만도 못한 채 복지부동하고 있고, 알만한 지식인들은 밑천이 떨어져 걸식에 바쁘다. 패배자들은 어쩌면 작금의 미국 발 금융위기를 바라보면서 진화론적 종말론에 신비주의자들처럼 메시아적 사건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경제위기는 임계점에 달했고, 서민들은 빚으로 혈세를 내야하고, 비정규직은 카스트제도처럼 굳어져가고 있다. &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039;지피지기&#039;면 &#039;백전불태&#039;라는 옛 경구가 그립다. 이명박 정권은 대단히 훌륭하게 자신의 통치전략을 추진해나가고 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039;우리들&#039;은 지금 &#039;저들&#039;은 물론, &#039;자신&#039;조차 모르고 있다. &#039;반공주의&#039;에 맞서 싸워온 &#039;민주주의&#039;라는 또 다른 전가의 보도는 &#039;선거&#039;와 &#039;투표&#039;라는 길들여진 게임의 규칙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039;선택&#039;과 &#039;연대&#039;를 통해 삶의 열정을 폭발시키는 새로운 거대담론으로 마름질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039;선택&#039;과 &#039;연대&#039;는 이 땅의 우익들만의 작업이 되면서 역사는 그저 반만 되풀이 되고 있다. 그나마 &#039;저들&#039;의 속내를 알려준 &#039;국방부&#039;에 감사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 지난 글들은 지행네트(&lt;A href=&quot;http://jihaeng.net/&quot;&gt;http://jihaeng.net&lt;/A&gt;) 정치사회비평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여러 독자분들이 비평글을 비롯한 대안지식연구회의 활동에 이런 저런 조언을 주시고 계십니다. 보다 많은 이들과의 공유를 위해 에디터(김윤철 &lt;A href=&quot;http://mail5.daum.net/hanmail/mail/MailComposeFrame.daum?TO=o:disorder@naver.com&quot; target=right&gt;disorder@naver.com&lt;/A&gt;)에게 메일을 보내시거나 게시판 댓글란에 감상평을 적어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향후 대안지식연구회의 활동과 비평 글쓰기에 참조토록 하겠습니다.&lt;/DIV&gt;&lt;/FONT&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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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국방부</category>
			<category>대안지식연구회</category>
			<category>이승원</category>
			<category>통치전략</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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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jihaeng.net/blog/124#entry124comment</comments>
			<pubDate>Mon, 22 Sep 2008 14:06:36 +0900</pubDate>
		</item>
		<item>
			<title>지식인의 현장- 세미나를 찬양함(김정한)</title>
			<link>http://jihaeng.net/blog/123</link>
			<description>&lt;DIV align=center&gt;&lt;STRONG&gt;지식인의 현장 - 세미나를 찬양함&lt;/STRONG&gt;&lt;/DIV&gt;
&lt;DIV&gt;&lt;br /&gt;&lt;br /&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김정한 &lt;/FONT&gt;&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lt;FONT size=2&gt;
&lt;DIV&gt;&lt;br /&gt;&lt;br /&gt;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준엄하다. 여기에는 현실과 멀어진 고색창연한 사회운동에 대한 비판이 함축되어 있고, 그보다 더 많게는 이론 일반, 특히 급진 이론에 대한 조롱이 담겨 있다.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론, 구체적인 삶과 부대끼지 않는 공허한 이론, 지식인들의 언어유희로 전락한 이론 등에 대한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정당한 비판은, 때로는 이론과 지식인의 존재 자체를 무용하거나 해악만 끼친다고 거부하는 반지성주의와 결합해, 비판 자체에 물릴 정도로 되풀이 넘쳐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러나 지식인에게 현장은 어디일까? 지식인에게도 현장은 노동과 빈곤이 있는 공장과 농촌, 다양한 사회 소수자들이 투쟁하는 집회와 농성장일까? 하지만 지식인이 지식을 연구하고 생산하는 존재라면, 지식인이 자신의 존재 이유(reason d&#039;etre)를 유지하면서 현장으로 가는 것만큼 난망한 일도 없다. 지식인이 대중들과 호흡하며 ‘교육자 자신이 교육되어야 한다’라는 맑스의 선언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물론 중요하지만, 공장과 거리에서 지식을 생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을 읽어야 하고 글을 써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지식인은 공부를 해야 한다. 물론 공부를 책상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공부를 하려면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돌아보면 내 공부다운 공부는 대학에 입학한 후 선배들이 준비한 ‘교양강좌’에서 시작되었고, 그후 줄곧 이런저런 소모임과 학회에서 선배나 친구들과 함께한 세미나에서 여러 고민을 다듬어갈 수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도 교육을 통해 많은 학문적 훈련을 쌓기도 했지만, 내 고유한 문제의식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는 역시 동학들과 진행한 학회의 수많은 세미나와 뒤풀이의 힘이 컸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여기서 말하는 세미나는 유명 인사들이 고매하게 교류하며 인맥을 쌓는 그런 허례허식의 세미나가 아니다. 두 명이든 세 명이든 정기적으로 모여 해당 텍스트를 이해하고, 토론을 통해 쟁점을 잡아내고, 비판의 논리를 벼리는 장으로서의 세미나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세미나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일은 매우 고되고 힘든 일이다. 가시적인 성과는 거의 없으며, 때때로 지루함과 무료함이 찾아오고,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 교육을 때로는 보완하고 때로는 뛰어넘으며, 새로운 이론과 급진적/근본적(radical) 문제의식을 집단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장으로서 세미나는 공부의 정도(正道)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 학생운동의 위기 이후 해체된 것이 바로 이런 세미나 체계였고,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진행된 대학(원) 사회에서 오늘날에는 거의 소멸 직전에 이르러 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나는 감히 지식인들이 돌아가야 할 현장은 세미나라고 말하고 싶다. 지식인들이 시대적 과제와 정세적 요구들에 실천적으로 부응해야 한다는 것은 옳다. 하지만 사실상 지식인이 혁명--혁명이라는 말에 값하는 혁명--을 일으키는 본체(本體)인 적은 없으며, 말과 글이 위력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지식인 자신이 세상을 변혁시킬 힘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 몫은 아마 대중들과 이들이 조직하고 대표하는 사회운동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그 조력자들 가운데 (때로는 중요한) 일부일 것이다. 이는 지식인들이 사회운동의 현장과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러나 지식인 고유의 현장은 공장이나 거리가 아니라 세미나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지식인이 세미나로 돌아간다는 것은 정세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책장을 넘기기겠다는 의미이다. 사회 구조와 그 모순을 이론적으로 인식하고, 비판의 논리를 가다듬고, 새로운 사회의 이론적 대안을 찾는다는 의미이다. 글과 삶이 최대한 가까워질 수 있는 작지만 견실한 공동체 공간을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런 곳이 지식인의 현장이 아닐까? 현장으로 가라는 지식인 비판(과 지식인의 자기 비판)에서 잊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세미나가 아닐까? 그러므로, 어느 날에도 나는 세미나를 마치고 뒤풀이를 하며 ‘아름다운 폐인’이 되어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것이다.&lt;/DIV&gt;
&lt;DIV&gt;&lt;/FONT&gt;&lt;/DIV&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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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세미나</category>
			<category>이론</category>
			<category>존재이유</category>
			<category>지식인</category>
			<category>학생운동의 위기</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23</guid>
			<comments>http://jihaeng.net/blog/123#entry123comment</comments>
			<pubDate>Fri, 12 Sep 2008 14:56:15 +0900</pubDate>
		</item>
		<item>
			<title>난도질 당하는 학문 조직(오창은)</title>
			<link>http://jihaeng.net/blog/122</link>
			<description>&lt;DIV align=center&gt;&lt;STRONG&gt;난도질 당하는 학문 조직&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오창은&lt;/FONT&gt;&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lt;FONT size=2&gt;
&lt;DIV&gt;&lt;br /&gt;&lt;STRONG&gt;거대학문권력의 탄생?&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인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의 모임에서 ‘학술진흥재단이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 소리에 한 문학박사가 귀를 쫑긋 세우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놀라워했다. 다른 연구자는 그간 학술진흥재단(학진)이 학문세계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거론하며, 차라리 잘 되었다고 맞장구를 쳤다. 어찌되었든, 그 모임에 참석한 연구자들은 대부분 한두번 인문사회과학 기초학문 지원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었고, 몇몇은 이번 여름을 인문한국(HK) 연구계획서 작성에 온전히 투자했으며, 한 연구자는 두뇌한국(BK)사업 중간보고 때문에 몸과 마음이 모두 소금에 절인 듯 무거워진 상태였다. 이 모든 사업은 학진에서 주관하고 있다. 학진의 사업일정은 박사급 비전임연구자들의 일상을 지배한다. 그것이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lt;/DIV&gt;
&lt;DIV&gt;&lt;br /&gt;대학의 전임교수 보다는 박사급 비전임연구자들에게 더 존재감이 높은 학진이 없어진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조직인 학진의 존폐가 무어 그리 대수이랴. 하지만, 그 이면의 맥락은 만만치 않은 함의를 안고 있어 문제적이다. 한국 학문세계의 이데올로기적 지형변화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차 한국학문은 국가기구에 의해 관리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할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 학진의 존폐가 아닌, 새롭게 탄생한 ‘한국연구재단(가칭)’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공공기관 선진화 방안과 ‘한국연구재단(가칭)’의 탄생&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지난 8월 26일, 기획재정부는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 주요 내용은 연구개발(R&amp;amp;D) 관련 정부 기관 및 진흥기관을 29개가 13개로 통합한다는 것이다. 지식경제부 산하 연구개발(R&amp;amp;D) 지원기관 6개가 3개로 통합되고,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연구재단 3개를 1개로 통합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에 따라 산업기술평가원과 산업기술재단, 부품소재산업진흥원, 기술거래소, 정보통신연구진흥원, 에너지기술기획평가원이 없어지고, 새롭게 산업분야와 에너지분야, 산업기술정책 등 3개 기관으로 재편될 전망이다. &lt;/DIV&gt;
&lt;DIV&gt;&lt;br /&gt;문제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연구재단의 재편에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정책실에 따르면, 한국과학재단, 한국학술진흥재단,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을 통합해 ‘(가칭)한국연구재단’을 설립하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그야말로 매머드급 ‘거대학문권력’의 탄생을 예고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른바 ‘제2차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에 묻혀 그 심각성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lt;/DIV&gt;
&lt;DIV&gt;&lt;br /&gt;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연구재단을 통합해 출범하게 될 ‘(가칭)한국연구재단’의 설립은 한국학문에 대한 거시적 시각에서 볼 때, 철회되어야 할 정책 추진이다. 더불어 이와 관련한 심각한 논의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지, 그리고 학문의 자율성 옹호가 한국사회의 일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정치적 성과주의에 매료된 통합의 논리&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가칭)한국연구재단’ 설립을 위한 문제의식은 ‘공공기관 선진화와 기구 통폐합을 통한 효율화’, 그리고 ‘신정부 출범 및 교육과기부 발족’에 따른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식으로 ‘새로운 연구지원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이 문제의식의 출발이다. 정치권에서 ‘잃어버린 10년’을 외쳐대며, ‘과거 흔적 지우기’에 몰두하는 맥락에서 ‘(가칭)한국연구재단’ 설립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매머드급 ‘(가칭)한국연구재단’이 설립되면, 그것이 비록 기존 연구관리기관의 통합일 지라도 새로운 조직의 탄생이기에 ‘하나의 성과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일종의 성과주의적 차원에서 조직의 통합을 바라봄으로써, 학문사회가 견지해야 할 자율성에 대한 고려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lt;/DIV&gt;
&lt;DIV&gt;&lt;br /&gt;학문 정책이나 학문 기구의 개편이 오로지 새정부 출범이라는 정치 논리와 효율이라는 경제논리에 의해 난도질 당하는 모습을 볼 때, 학문연구자들은 스스로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여기에는 학문이 전혀 자율적이지 못하는 상처를 포함하고 있으며, 학문세계가 궁극의 가치를 향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지는 극심한 좌절감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정부의 통합안에는 1977년에 설립되어 31여년의 역사성을 가진 ‘한국과학재단’, 1981년에 설립되어 27년간 한국학문 진흥의 논리를 개발해 온 ‘한국학술진흥재단’에 대한 존중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인문정신은 과거와 역사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시작한다. 청산하고 재편하려고 칼부터 들이대는 태도에서 인문학을 포함한 학문을 존중하려는 태도를 읽어낼 수는 없다. 다분히 청산주의적 태도를 보이면서, 정치적 성과를 위해 기획된 듯한 ‘(가칭)한국연구재단’ 설립은 그 발상부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lt;/DIV&gt;
&lt;DIV&gt;&lt;br /&gt;게다가 통합의 논리도 빈약하기 이를데 없다. ‘(가칭)한국연구재단’이 설립되면 이공분야와 인문사회분야의 융합연구가 촉진되고, 기초연구 비중이 높아지며, 연구자의 행정부담이 완화되고, PM의 역할이 강화된다고 한다. 이러한 개선 사항이 왜 통합을 통해서만 가능한 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lt;/DIV&gt;
&lt;DIV&gt;&lt;br /&gt;통합의 효과로 제시된 사항은 기존 조직 체계에서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할 사항인데, 오직 통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가. 통합의 논리는 단지 조직의 일원화를 통해 국가 관리의 수월성을 제고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일 뿐이다. 게다가 연구 지원을 받는 당사자인 학문연구자들의 광범위하고 실질적인 의견수렴과정을 거치지 않고 급박하게 추진하는 현 상황도 문제가 많다. 수요자 중심의 연구관리 제도를 확립하겠다는데, 수요자가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행정기구의 재편에 따른 파장에 대해서는 무심한 채, 연구자들에게 재편 이후의 상황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강요를 하고 있는 셈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학문지원정책과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 &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현 정부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이야기하는 시기의 국가 주도의 학문지원정책은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039;에 입각해 있었다. 대리인 이론은 주당사자(principal)가 대리인(agency)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이다. 가시적이기도 하고 비가시적이기도 한 이러한 부가가치는 장기적이면서도 지속적인 투자와 간접화된 개입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학술진흥재단을 포함한 학문지원시스템은 큰 범주에서는 국가(혹은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주당사자’가 ‘대리인’으로 학술진흥재단․한국과학재단을 내세워 진행하는 학문지원정책이다. 그래서 학술진흥재단 등은 다시 ‘주당사자’가 돼 ‘각 대학’ 혹은 ‘학문연구자’를 ‘대리인’ 삼아 학문의 성과를 의뢰했다. 서로가 연관돼 있는 이러한 관계는 큰 틀에서 볼 때 학문에 대한 국가의 간접화된 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학술진흥재단은 중간자로서 ‘학문연구의 내용에 대한 개입’은 가급적 회피해 왔다. 이러한 합리적 학문개입으로 인해 학문연구자들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시스템에 양가적 감정을 가져왔다. 학문의 상대적 자율성의 보존하려는 태도에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도, 지원 제도라는 것 자체가 학문세계에 대한 개입이라는 비판적 인식을 지녀왔던 것이다. 학술진흥재단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던 연구자들은 근본적으로 국가기구의 학문영역에 대한 개입을 거부했고, 학술진흥재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학문세계의 자율성을 보존하려 노력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국가기구에 의한 학술연구의 종속 가능성&lt;/STRONG&gt;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하지만, ‘(가칭)한국연구재단’의 설립은 대리인 이론이 갖고 있던 합리성마저 포기하는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국가가 직접 학문의 흐름을 주도하려는 의도가 내비춰진다는 것이다. 교과부가 직접 ‘(가칭)한국연구재단’의 운영에 개입하여 특정 연구과제를 설정하고, 선정에도 개입하려 한다. 즉, ‘(가칭)한국연구재단’의 국가기구로부터의 독립성이 보장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교과부가 ‘연구과제의 조직화’ ‘연구개발 계획서의 검토 및 조정’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안이 마련한 것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이공분야와 인문사회분야가 ‘(가칭)한국연구재단’에 함께 존재하게 됨으로써, 이공분야의 논리로 인문사회분야 지원시스템을 만들 경우, 국가가 학술연구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여지에 대한 인문사회분야의 반발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lt;/DIV&gt;
&lt;DIV&gt;&lt;br /&gt;연구주제를 국가기구에서 공모하고, 그 연구팀 선정에 직접 개입하게 될 경우 학문은 도구화될 수밖에 없다. 국가기구가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학문을 호명할 수는 있다. 이공계 분야에서는 비일비재한 것이 국가기구의 개입에 의한 특정 과학기술분야의 발전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조건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와 이에 관한 성찰을 통해 ‘다른 미래에 대한 상상’을 지향하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뤄지는 국가기구의 개입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기구가 공동체 내의 담론체계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개입했을 때, 집단적 불행이 따라왔음은 역사적 사실들이 증언한다. 전체주의 사회는 폭력을 통합 억압으로만 유지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적 상황을 합리화한 다양한 학문적 지원 속에서 그 기반을 다졌다. 파시즘 체제도 광범위한 대중의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데, 그 동의의 저변에는 동원된 학문세계의 이데올로기적 뒷받침이 있었다. 그래서, 학문지원 체계를 거대기구로 통합해 국가가 관리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amp;nbsp; &lt;/DIV&gt;
&lt;DIV&gt;&lt;br /&gt;‘(가칭)한국연구재단’의 설립은 향후 학문연구자들의 학문적 독립성을 훼손할 뿐 만 아니라, 학문에 대한 국가개입이 노골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거대학문권력’의 탄생을 예고한다. 국가 기구가 학문을 조정하려는 순간, 그 사회는 정신적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 학문의 자유가 박탈당한 사회는 영혼을 강탈당한 육신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내년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가칭)한국연구재단’ 설립에 모두가 주목해야 한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 대안지식연구회의 정치사회비평 지난글들은 지행네트워크 홈페이지(&lt;A href=&quot;http://jihaeng.net/&quot;&gt;http://jihaeng.net&lt;/A&gt;)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lt;br /&gt;&lt;/DIV&gt;&lt;/FONT&gt;&lt;br /&gt;&lt;FONT size=2&gt;※ 편지내용이 잘 안보이시면 &#039;원문보기&#039;를 눌러서 보시기 바랍니다. 브라우저에서 해당 언어의 인코딩을 지원해야 합니다.&lt;br /&gt;&lt;br /&gt;&lt;/FONT&gt;&lt;A href=&quot;http://wwl389.hanmail.net/Mail-bin/view_submsg.cgi?TM=Yc9Q727BFSPMAt7dK%2FOffx41tQgA21KCHyRSTzlGhq9FTwi%2FFi4wnbm96yHKHJRFd5p6kmIc1X%2Fqw0ctCL5Xv0ZhGgGIbABVJDE%2FdpN6wqUoLigwG3X6nHbwEARWGR1T1Ql0D1ryX%2F4N4IZjOup7CxS6xm1oFA7Yz4eA91flkIAC4to9DW2W2kU2xpBEHV0cMdsMr7RG9Yf%2BjPbFvWH7XQ%3D%3D&amp;amp;MSGID=z000000000J9j5y&amp;amp;pos=18358&amp;amp;bodylen=18252&amp;amp;type=foreign&quot;&gt;&lt;FONT size=2&gt;원문보기&lt;/FONT&gt;&lt;/A&gt;&lt;br /&gt;&lt;FONT size=2&gt;언어종류: utf-8&lt;br /&gt;Content-Type: text/html &lt;/FONT&gt;&lt;TEXTAREA id=RE_CONTENT style=&quot;DISPLAY: none&quot;&gt;﻿&amp;lt;!DOCTYPE HTML PUBLIC &quot;-//W3C//DTD HTML 4.0 Transitional//EN&quot;&am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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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 align=center&amp;gt;&amp;lt;FONT size=2&amp;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amp;lt;/FONT&amp;gt;&amp;lt;/DIV&am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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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amp;gt;&amp;lt;BR&amp;gt;&amp;lt;STRONG&amp;gt;거대학문권력의 탄생?&amp;lt;/STRONG&amp;gt;&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amp;nbsp;&amp;lt;/DIV&amp;gt;
&amp;lt;DIV&amp;gt;인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의 모임에서 ‘학술진흥재단이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 소리에 한 문학박사가 귀를 쫑긋 세우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놀라워했다. 다른 연구자는 그간 학술진흥재단(학진)이 학문세계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거론하며, 차라리 잘 되었다고 
맞장구를 쳤다. 어찌되었든, 그 모임에 참석한 연구자들은 대부분 한두번 인문사회과학 기초학문 지원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었고, 몇몇은 이번 여름을 
인문한국(HK) 연구계획서 작성에 온전히 투자했으며, 한 연구자는 두뇌한국(BK)사업 중간보고 때문에 몸과 마음이 모두 소금에 절인 듯 무거워진 
상태였다. 이 모든 사업은 학진에서 주관하고 있다. 학진의 사업일정은 박사급 비전임연구자들의 일상을 지배한다. 그것이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BR&amp;gt;대학의 전임교수 보다는 박사급 비전임연구자들에게 더 존재감이 높은 학진이 없어진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조직인 학진의 
존폐가 무어 그리 대수이랴. 하지만, 그 이면의 맥락은 만만치 않은 함의를 안고 있어 문제적이다. 한국 학문세계의 이데올로기적 지형변화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차 한국학문은 국가기구에 의해 관리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할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 학진의 존폐가 아닌, 
새롭게 탄생한 ‘한국연구재단(가칭)’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amp;nbsp;&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STRONG&amp;gt;공공기관 선진화 방안과 ‘한국연구재단(가칭)’의 탄생&amp;lt;/STRONG&amp;gt;&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amp;nbsp;&amp;lt;/DIV&amp;gt;
&amp;lt;DIV&amp;gt;지난 8월 26일, 기획재정부는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 주요 내용은 연구개발(R&amp;amp;amp;D) 관련 정부 기관 및 
진흥기관을 29개가 13개로 통합한다는 것이다. 지식경제부 산하 연구개발(R&amp;amp;amp;D) 지원기관 6개가 3개로 통합되고,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연구재단 3개를 1개로 통합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에 따라 산업기술평가원과 산업기술재단, 부품소재산업진흥원, 기술거래소, 
정보통신연구진흥원, 에너지기술기획평가원이 없어지고, 새롭게 산업분야와 에너지분야, 산업기술정책 등 3개 기관으로 재편될 전망이다. &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BR&amp;gt;문제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연구재단의 재편에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정책실에 따르면, 한국과학재단, 한국학술진흥재단, 
구제과학기술협력재단을 통합해 ‘(가칭)한국연구재단’을 설립하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그야말로 매머드급 ‘거대학문권력’의 탄생을 예고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른바 ‘제2차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에 묻혀 그 심각성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BR&amp;gt;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연구재단을 통합해 출범하게 될 ‘(가칭)한국연구재단’의 설립은 한국학문에 대한 거시적 시각에서 볼 때, 
철회되어야 할 정책 추진이다. 더불어 이와 관련한 심각한 논의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지, 그리고 학문의 자율성 
옹호가 한국사회의 일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amp;nbsp;&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STRONG&amp;gt;정치적 성과주의에 매료된 통합의 논리&amp;lt;/STRONG&amp;gt;&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amp;nbsp;&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amp;nbsp;‘(가칭)한국연구재단’ 설립을 위한 문제의식은 ‘공공기관 선진화와 기구 통폐합을 통한 효율화’, 그리고 ‘신정부 출범 및 
교육과기부 발족’에 따른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식으로 ‘새로운 연구지원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이 문제의식의 출발이다. 정치권에서 ‘잃어버린 10년’을 외쳐대며, ‘과거 흔적 지우기’에 몰두하는 맥락에서 ‘(가칭)한국연구재단’ 설립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매머드급 ‘(가칭)한국연구재단’이 설립되면, 그것이 비록 기존 연구관리기관의 통합일 지라도 새로운 조직의 탄생이기에 
‘하나의 성과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일종의 성과주의적 차원에서 조직의 통합을 바라봄으로써, 학문사회가 견지해야 할 
자율성에 대한 고려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BR&amp;gt;학문 정책이나 학문 기구의 개편이 오로지 새정부 출범이라는 정치 논리와 효율이라는 경제논리에 의해 난도질 당하는 모습을 볼 때, 
학문연구자들은 스스로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여기에는 학문이 전혀 자율적이지 못하는 상처를 포함하고 있으며, 학문세계가 
궁극의 가치를 향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지는 극심한 좌절감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정부의 통합안에는 1977년에 설립되어 31여년의 역사성을 
가진 ‘한국과학재단’, 1981년에 설립되어 27년간 한국학문 진흥의 논리를 개발해 온 ‘한국학술진흥재단’에 대한 존중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인문정신은 과거와 역사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시작한다. 청산하고 재편하려고 칼부터 들이대는 태도에서 인문학을 포함한 학문을 존중하려는 
태도를 읽어낼 수는 없다. 다분히 청산주의적 태도를 보이면서, 정치적 성과를 위해 기획된 듯한 ‘(가칭)한국연구재단’ 설립은 그 발상부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BR&amp;gt;게다가 통합의 논리도 빈약하기 이를데 없다. ‘(가칭)한국연구재단’이 설립되면 이공분야와 인문사회분야의 융합연구가 촉진되고, 
기초연구 비중이 높아지며, 연구자의 행정부담이 완화되고, PM의 역할이 강화된다고 한다. 이러한 개선 사항이 왜 통합을 통해서만 가능한 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BR&amp;gt;통합의 효과로 제시된 사항은 기존 조직 체계에서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할 사항인데, 오직 통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가. 통합의 논리는 단지 조직의 일원화를 통해 국가 관리의 수월성을 제고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일 뿐이다. 게다가 연구 지원을 받는 당사자인 
학문연구자들의 광범위하고 실질적인 의견수렴과정을 거치지 않고 급박하게 추진하는 현 상황도 문제가 많다. 수요자 중심의 연구관리 제도를 
확립하겠다는데, 수요자가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행정기구의 재편에 따른 파장에 대해서는 무심한 채, 연구자들에게 재편 이후의 
상황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강요를 하고 있는 셈이다. &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amp;nbsp;&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STRONG&amp;gt;학문지원정책과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 &amp;lt;/STRONG&amp;gt;&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amp;nbsp;&amp;lt;/DIV&amp;gt;
&amp;lt;DIV&amp;gt;현 정부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이야기하는 시기의 국가 주도의 학문지원정책은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039;에 입각해 
있었다. 대리인 이론은 주당사자(principal)가 대리인(agency)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이다. 
가시적이기도 하고 비가시적이기도 한 이러한 부가가치는 장기적이면서도 지속적인 투자와 간접화된 개입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학술진흥재단을 포함한 
학문지원시스템은 큰 범주에서는 국가(혹은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주당사자’가 ‘대리인’으로 학술진흥재단․한국과학재단을 내세워 진행하는 
학문지원정책이다. 그래서 학술진흥재단 등은 다시 ‘주당사자’가 돼 ‘각 대학’ 혹은 ‘학문연구자’를 ‘대리인’ 삼아 학문의 성과를 의뢰했다. 
서로가 연관돼 있는 이러한 관계는 큰 틀에서 볼 때 학문에 대한 국가의 간접화된 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학술진흥재단은 중간자로서 
‘학문연구의 내용에 대한 개입’은 가급적 회피해 왔다. 이러한 합리적 학문개입으로 인해 학문연구자들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시스템에 양가적 감정을 
가져왔다. 학문의 상대적 자율성의 보존하려는 태도에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도, 지원 제도라는 것 자체가 학문세계에 대한 개입이라는 비판적 인식을 
지녀왔던 것이다. 학술진흥재단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던 연구자들은 근본적으로 국가기구의 학문영역에 대한 개입을 거부했고, 학술진흥재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학문세계의 자율성을 보존하려 노력했다. &amp;lt;/DIV&am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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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amp;gt;하지만, ‘(가칭)한국연구재단’의 설립은 대리인 이론이 갖고 있던 합리성마저 포기하는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국가가 
직접 학문의 흐름을 주도하려는 의도가 내비춰진다는 것이다. 교과부가 직접 ‘(가칭)한국연구재단’의 운영에 개입하여 특정 연구과제를 설정하고, 
선정에도 개입하려 한다. 즉, ‘(가칭)한국연구재단’의 국가기구로부터의 독립성이 보장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교과부가 ‘연구과제의 조직화’ ‘연구개발 계획서의 검토 및 조정’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안이 마련한 것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이공분야와 인문사회분야가 ‘(가칭)한국연구재단’에 함께 존재하게 됨으로써, 이공분야의 논리로 인문사회분야 지원시스템을 만들 경우, 국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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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amp;gt;&amp;lt;BR&amp;gt;연구주제를 국가기구에서 공모하고, 그 연구팀 선정에 직접 개입하게 될 경우 학문은 도구화될 수밖에 없다. 국가기구가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학문을 호명할 수는 있다. 이공계 분야에서는 비일비재한 것이 국가기구의 개입에 의한 특정 과학기술분야의 발전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조건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와 이에 관한 성찰을 통해 ‘다른 미래에 대한 상상’을 지향하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뤄지는 국가기구의 개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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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도 광범위한 대중의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데, 그 동의의 저변에는 동원된 학문세계의 이데올로기적 뒷받침이 있었다. 그래서, 학문지원 체계를 
거대기구로 통합해 국가가 관리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amp;amp;nbsp; &amp;lt;/DIV&amp;gt;
&amp;lt;DIV&amp;gt;&amp;lt;BR&amp;gt;‘(가칭)한국연구재단’의 설립은 향후 학문연구자들의 학문적 독립성을 훼손할 뿐 만 아니라, 학문에 대한 국가개입이 노골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거대학문권력’의 탄생을 예고한다. 국가 기구가 학문을 조정하려는 순간, 그 사회는 정신적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 학문의 
자유가 박탈당한 사회는 영혼을 강탈당한 육신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내년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가칭)한국연구재단’ 설립에 
모두가 주목해야 한다. &amp;lt;/DIV&am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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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t;DIV&amp;gt;* 대안지식연구회의 정치사회비평 지난글들은 지행네트워크 홈페이지(&amp;lt;A 
href=&quot;http://jihaeng.net&quot;&amp;gt;http://jihaeng.net&amp;lt;/A&amp;gt;)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amp;lt;BR&amp;gt;&amp;lt;/DIV&amp;gt;&amp;lt;/FONT&amp;gt;&amp;lt;/td&amp;gt;&amp;lt;/table&amp;gt;&amp;lt;/HTML&amp;gt;
&lt;/TEXTAREA&gt; &lt;!-- 메일 내용 End --&gt;&lt;!-- //HM_MAILCONTENT --&gt;&lt;!-- 내용 부분 End --&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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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거대학문권력</category>
			<category>공공기관 선진화</category>
			<category>오창은</category>
			<category>학술진흥재단</category>
			<category>한국연구재단</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22</guid>
			<comments>http://jihaeng.net/blog/122#entry122comment</comments>
			<pubDate>Mon, 01 Sep 2008 14:45:42 +0900</pubDate>
		</item>
		<item>
			<title>대안세력은 어디에 있는가?(이영제)</title>
			<link>http://jihaeng.net/blog/121</link>
			<description>&lt;DIV style=&quot;FONT: 10pt 굴림&quot; align=center&gt;&lt;STRONG&gt;&lt;FONT size=3&gt;대안세력은 어디에 있는가?&lt;/FONT&gt;&lt;/STRONG&gt;&lt;/DIV&gt;
&lt;DIV&gt;&lt;br /&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이영제&lt;/FONT&gt;&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FONT&gt;&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br /&gt;&lt;/FONT&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촛불시위라는 국민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독주는 계속되고 있다. 강부자·고소영 내각 임명과 쇠고기 수입개방, 기업 편들기와 공기업 임원에 대한 낙하산 인사, 언론 장악과 사정기관의 종복화, ‘건국절’이라는 이종적 국경일의 도입 시도 등은 여론의 반발을 고려할 때 어느 것 하나 결코 추진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상실한 헤게모니를 상쇄하기 위해 물리력을 노골적으로 동원하는 강수를 두면서 까지도 드라이브를 멈추지 않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뒷받침되었다.&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STRONG&gt;이명박 대통령 추진력의 세 가지 배경&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첫째, 언론·사정기관의 사유화이다. 언론 및 사정기관의 사유화는 일방향적 소통을 강제하기 이전에 양방향적 소통을 차단하고 대항담론 형성 및 담론 형성 네트워크를 통제함으로써 대항 헤게모니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제16대 대선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대거 양성된 보수 네티즌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둘째, 대안 정치세력의 부재이다. 제도정치 영역에서 비보수정치세력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큰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 더 나아가 예상가능 기간 동안 중앙정치 영역에서 제도적 대안세력의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촛불시위 발생 배경의 하나가 되기도 한 대안 정치세력의 부재는 사사건건 대통령과 국민이 직접 맞닥뜨리는 서로에게 ‘피곤한’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기력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이명박 대통령이 과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셋째, 가장 주요하게 다수의 비동원상태의 유지이다. 참여정부 이후 지속된 각종 선거와 대선과 총선, 교육감 선거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보수적 동원이 진보적 동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중간층 또는 무당파층의 최소동원 상태만 유지된다면 정권 유지 및 재창출에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즉 저항의 가능성이 높더라도 그것을 여론조사에서만 분석 가능한 잠재화된 상태로 관리하는 것으로 비가시적인 여론의 무시와 가시적 저항에 대한 억압 또는 분리로 나타나고 있다.&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STRONG&gt;비보수세력의 집권은 여전히 ‘예외상태’&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우측깜박이를 킨 이명박 대통령의 후진은 좌측깜박이를 키고 우회전한 노무현 정권의 실패한 개혁의 연장선에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정치해 입문했다는 점 이외에도 절차적 정당성을 절대화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집시법은 노무현 정권 하에서 조금 더 개악되었고, 집회 및 시위에 대한 불허와 폭력적 진압은 노무현 정권 당시에도 현재보다 덜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임채진 검찰총장과 어청수 경찰청장, 김종훈 통산교섭본부장 등은 ‘간지나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은 이들이다.&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보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가 단순히 이명박 대통령을 탄생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개혁적 세력의 집권이 예외상태라는 인식을 확고히 했다는 점이다. 보수세력의 집권이 정상적인 상태이고 개혁적 세력의 집권은 보수세력의 실패와 포풀리즘과 같은 술수에 기인한 예외적 상태라는 것이다. 결국, 노무현 정권의 실패와 언론․사정기관의 도구화 등은 보수집권이라는 정상상태에 대한 확신이 개혁적 세력 집권이라는 예외상태에 대한 두려움에 비해 월등했다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STRONG&gt;저항의 조직화와 대안의 부재&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이명박 대통령의 독주와 지난 10년간 진행된 개혁의 급속한 후퇴, 그리고 제도정치 영역에서의 개혁-진보라 일컬어지는 세력들의 침체는 다양한 이슈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amp;nbsp; ‘직접행동’과 ‘반 이명박 연대’과 같은 바리케이트 전술, 풀뿌리 민주주의와 같은 진지전 등 다양한 형태의 대안의 조직화로 이어지고 있다. 다양하게 조직되는 저항들은 진보세력을 동원하는 데에는 성공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 어느 것도 비동원상태의 시민들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보인다.&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STRONG&gt;시민운동, 대안세력이 아닌 기성정치세력&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새로운 대안으로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가 거론되고 있다. 그동안 주저했던 시민운동 진영이 지방선거를 계기로 전면적인 정치세력화를 시도하는 것이 비동원 또는 반동원 상태의 무당파 층에게 어떠한 감동과 동기를 부여할 지는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시민운동은 이미 대안세력이기보다는 기성정치세력으로 상상의 영역이 아닌 현실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STRONG&gt;기존 정치세력의 분화와 진보-개혁적 재구성은 어떨까?&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앞에서 언급했듯이 새로운 대안세력의 성장은 너무나 먼 이야기이다. 물론 이것이 가치 없다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려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세력과 다를 바 없는 구 민주당 세력과 사이비 개혁의 전도사인 열린우리당세력이 합친 민주당은 어떠한 덧칠을 한다고 해도 대안세력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특히 이들의 지리멸렬함은 될 것도 안 되게 만드는 ‘마이너스의 손’에 다름 아니다.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역시도 현실적인 대안세력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뿐만 아니라 ‘비판적 지지’가 보여주듯이 이들의 독자적 성장을 하염없이 기다릴 만큼 국민들은 여유롭지 못하다. 새로운 대안세력의 성장보다는 오히려 보수세력의 자멸과정에서 구래의 ‘대항세력’이 권력을 획득하는 예외상태가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시민운동 세력을 포함한 기존 정치세력을 가치와 정책을 중심으로 재구성 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일 수 있겠다. 기존의 ‘반00’와 같이 타자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는 양적인 연합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정책을 중심으로 능동적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질적인 연합의 형성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는 중도-개혁세력의 분화, 진보정당의 스펙트럼 확장, 시민운동 세력의 가치-정책지향적 참여가 병행되어야 한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 대안지식연구회의 지난 정치사회비평 글들은 지행네트워크 홈페이지(&lt;A href=&quot;http://jihaeng.net/&quot;&gt;http://jihaeng.net&lt;/A&gt;) 정치사회비평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lt;/FONT&gt;&lt;/DIV&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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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가치연대</category>
			<category>여론의 무시</category>
			<category>예외상태</category>
			<category>이명박 대통령</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21</guid>
			<comments>http://jihaeng.net/blog/121#entry121comment</comments>
			<pubDate>Mon, 18 Aug 2008 13:44:2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대한민국 진실의 순간, &#039;기륭&#039;의 투쟁(이승원)</title>
			<link>http://jihaeng.net/blog/120</link>
			<description>&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lt;STRONG&gt;&quot;대한민국 진실의 순간, &#039;기륭&#039;의 투쟁&quot;&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이 승 원&lt;br /&gt;(대안지식연구회)&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lt;FONT size=2&gt;
&lt;DIV&gt;&lt;br /&gt;&lt;STRONG&gt;진실의 순간&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quot;The moment of Truth&quot;, 말 그대로 &quot;진실의 순간&quot;이다. 스페인어로 &quot;Moment De La Verdad&quot;. 성난 황소와 유희를 즐기던 투우사가 긴 칼을 들어 황소의 정수리를 찌르는 마지막의 순간에 외치는 소리이다. 이를 어떤 스페인 학자는 특정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039;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순간&#039;으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황소가 쓰러지든 투우사가 짓밟히든 이 진실의 순간을 양자는 피해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2008년 대한민국의 여름. 우리가 탈출할 수 없는 &#039;진실의 순간&#039;은 무엇일까?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며칠 전 경찰 특수기동대의 소름끼치는 시위진압 훈련과 국군의 가공할만한 독도방어훈련이 언론을 통해 보여졌다. 국가의 억압적 기재들의 때 아닌 언론전시는 우리에게 탱크와 장갑차의 굉음이 만들어낸 1961년 5월과 1979년 12월의 전율과 공포를 떠오르게 했다. 이를 시작으로 계엄 이상의 공포정치를 펼치고 있는 2008년 이명박 정부는 투우사가 달려드는 황소를 향해 칼을 휘두르듯, 여기저기서 난도질을 하고 있다. &amp;nbsp;&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체포수당으로 혈안이 된 경찰 특수기동대들이 촛불거리를 질주하기 시작했고, 최근 국무총리는 헌법에 명시된 국회의 출석요구를 관례를 이유로 무시해버렸다. YTN 사장 선임이 깡패를 동원하여 진행되는 동안 감사원은 KBS 특별감사 결과보고에서 KBS이사장에게 정연주 사장에 대한 해임을 요구했고, 이사회는 재청해버렸다. 이명박-부시 간의 한미정상회담은 한편으로는 미국산 스테이크를 한우갈비와 동격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우익세력들에게 서울시청광장을 내어주는 소기의 성과를 내며 짧게 끝났다. 그러는 동안 정부는 해방보다 분단을 더 강조하는 &#039;건국절&#039; 제정을 추진하면서 과거사 청산의 기회를 &#039;청산&#039;하려 하고 있으며,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을 이유로 기준금리를 0.25%p 인상하여 서민들의 대출이자에 대한 부담을 더욱 크게 하였다. 찌는 무더위만큼 일사불란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이명박 정부의 사회장악 프로그램은 우리의 호흡을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러나, 촛불의 거리에도, 국회 국정조사장에도, KBS와 청와대에도 진실의 순간은 없었다.거리의 촛불이 꺼진다해서 민주주의가 말살되는 것도 아니고, 총리의 국회폄하가 야당을 더 급진적으로 만들 것 같지도 않다. YTN과 KBS 사장이 누가 된다하더라도 기자들이 자신의 양심을 배반하지 않는 한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lt;STRONG&gt;&quot;기륭&quot;의 호흡&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대한민국 진실의 순간은 기륭전자 해고 여성노동자들의 농성장에서 소리없이, 그러나 아주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이 왜 1000일 넘는 농성투쟁을 이어가고 있고, 촛불의 그림자 속에서 결국 30kg의 몸무게로 폭염 속에서 관까지 짜가며 두 달 가까이 단식투쟁을 해야하는지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들은 싸워왔고, 그 때부터 &#039;우리&#039;는 그들의 투쟁을 &#039;알고&#039;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짧아져가는 그들의 호흡이 우리의 동맥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지난 3개월 간 &#039;우리&#039;는 촛불의 거리에서 &#039;민주공화국&#039;을 외쳤고, 그 속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급기야 미국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 독도 사태를 진정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위생과 검역주권, 국민주권, 영토주권을 위해 거리로 나가 폭염과 폭정에 맞서 싸운 &#039;우리&#039;는 &#039;비정규직&#039;문제를 &#039;운동권&#039; 중심의 의제이고 따라서 촛불집회에서 크게 다뤄지면 집회가 변질되고 대중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출처없는 우려 때문에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기륭전자와 함께 KTX, 뉴코아-이랜드, 코스콤, 재능교육 등 800만 비정규직들은 관중없는 경기장에서 국가의 칼을 피해가며 지쳐가고 있었다.&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들의 정수리에 언제 국가의 칼이 꽂혀 쓰러질지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그 쓰러짐이 그저 신문의 한 단면을 장식하는 일상의 일로 여기는 우리의 &quot;익숙함&quot;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러다 소리없이 우리의 숨도 끊기고 그래서 그저 순응하는 비정규직 주체로 하루하루를 사측과 정부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부끄러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lt;STRONG&gt;실패한 파시스트의 소망&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통치자가 가장 바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국가폭력의 미학이다. 법질서의 원활한 유지를 위해서는 처벌의 엄격함이 필요하고, 그 처벌의 엄격함은 경찰, 감옥과 같은 폭력적 기재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육해공군의 위용이 그 배후를 장식한다. 통치자는 그 국가폭력이 사회적 거부감을 만드는 것을 원치않는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어야하고, 특수기동대의 로보캅복장과 공군 F-15K의 세련미는 정의를 지키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상징이어야 한다. 법질서가 폭력적 기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철학과 국민들의 순종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통치자의 또 하나의 소망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이 &#039;민족주의&#039;이고, &#039;통일&#039;이고, &#039;잘살아보세&#039;이다. 대한민국의 좌우가 독도문제처럼 하나가 된 적이 드물고, &#039;반통일&#039; 세력만큼 배신자가 없고, 잘 살자는데 재뿌리는 듯하면 그 결과는 뻔하다. 과거 유신과 5공의 독재자들은 그래서 교복을 입혔고, 반공글짓기와 포스터 그리기를 번갈아 시켰고, 국기에 대한 경례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했고, 농촌에 시멘트 푸대를 배급하였고, 식모와 버스안내양을 도시의 &#039;공순이&#039;로 불러들였다. 질서유지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처벌하기 쉬웠던 만큼 질서유지가 쉽고 편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현직 대통령은 폭력과 전체주의를 아름답게 조화시킨 과거의 파시스트 통치자들을 부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폭력적 기재들을 재정비하면서 그 위용으로 슬그머니 대중들을 위협하고 있다. 그렇게 촛불을 끄려하고 있고, 그렇게 제도정치를 변질시키고 있고, 그러면서 우익보수세력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민통합을 꿈꾸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직 대통령은 가난과 실업을 외부의 적에게 돌려버린 영악한 파시스트가 절대로 될 수 없다. 그저 반민주적 독재자라는 삼류 정치인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권력재창출에 끊임없이 불안해 해야만 한다(파시스트가 차라리 낫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비정규직 문제에서 비롯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20-30여년 전 노동현장에서의 차별과 폭력의 수준이야 야만에 가까웠지만, 높은 경제성장률은 높은 고용률과 함께 했고, 상대적으로 낮은 실업률의 유지는 적어도 국민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면 &#039;나도 함께&#039;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일할 수 있었고, 그래서 싸울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국가는 이를 미끼로 국가폭력을 사회적으로 미화시킬 수 있었고, 국민들은 어찌되었든 &#039;조국근대화&#039;와 &#039;선진조국창조&#039;에 하나되어 매진할 수 있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러나, 현재의 비정규직 문제는 현직 대통령이 폭력을 미화하고 국민을 하나로 묶어 강력한 파시스트 국가로 나아갈 수 없도록 하는 최대 장애물이다.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이 유지되는 한 비정규직 문제는 악화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로 인한 고용불안과 사회양극화의 심화는 과거와 같은 양적지표에 따른 경제발전 환상을 유지시킬 수 없도록 한다. 이들의 존재가 드러날수록 환상은 여지없이 깨져버리고, 따라서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한 국가의 폭력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현직 대통령과 조중동이 방치와 침묵으로 기륭을, 이랜드를, KTX를 고사시키려하는 이유가 바로 파시스트가 되지 못하는 자신들의 3류정치 한계에 있는 것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lt;STRONG&gt;&quot;기륭&quot;의 방치와 사회적 죽음&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현직 대통령과 조중동이 방치와 침묵을 비정규직에 대한 전술로 취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갈등과 균열을 부채질 할 수 있는, 즉 &quot;손안대고 코푸는&quot; 방법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내 가족과 이웃이 함께 신자유주의 국가와 자본의 반민주적 차별에 맞설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의제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거대 노총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거대한 철학과 인식의 강물은 오히려 노동운동의 후퇴와 신자유주의의 반동적 강화를 가져왔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결국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의 정수리에 해고의 칼날이 소리없이, 그리고 잔인하게 꽂히는 동안, 그리고 KTX, 코스콤, 이랜드의 투쟁이 고사되는 동안, 그래서, 그 투쟁의 끝과 함께 우리의 호흡도 멈추게되는 동안 정부는 가장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줄 알았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손쉽게 진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게다가 올림픽이 시작되었고, 잊을만하면 독도문제, 파병문제 등이 터져주면서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과 우리의 정수리에 칼날이 꽂히는 소리는 더욱 더 들리지 않고 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현직 대통령 이명박의 파시스트 소망은 실패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륭이 모두에게서 방치되는 한, 그리고 800만 비정규직들의 호흡이 우리의 동맥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광우병 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회적 죽음이 우리의 정수리로부터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만일 이 사실이 두렵다면 &#039;우리&#039;는 반성과 함께 보다 새로운 투쟁, 보다 강력한 연대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lt;br /&gt;&lt;/DIV&gt;
&lt;DIV&gt;* 대안지식연구회의 지난 정치사회비평 글들은 지행네트워크 &lt;A href=&quot;http://jihaeng.net/&quot;&gt;http://jihaeng.net&lt;/A&gt;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lt;/DIV&gt;&lt;/FONT&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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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기륭전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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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진실의 순간</category>
			<category>촛불</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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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8 Aug 2008 17:59:2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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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건국 60년을 다시 생각한다(김원)</title>
			<link>http://jihaeng.net/blog/119</link>
			<description>&lt;DIV align=center&gt;&lt;STRONG&gt;“건국 60년을 다시 생각한다” &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lt;br /&gt;김 원&lt;/FONT&gt;&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대안지식연구회)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STRONG&gt;&lt;br /&gt;광복절 혹은 건국절?&lt;/STRONG&gt;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최근 정부가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며 &#039;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039; 구성과 관련사업 추진을 지시해 문제시되고 있다. 이 사업은 관 주도인데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뉴라이트 등 일부 움직임과 직결되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8.15는 우리에게는 ‘광복’ 혹은 ‘해방된 날’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1945년 8.15이며, 1948년 8.15는 다른 의미이다. 48년은 남북한 분단정부가 가시화된 시점이며, 이를 법적으로 남북한이 정당화한 때다. 그래서 사람들도 1948년 8.15는 별로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특히 4.3 항쟁 피해자와 가족들, 해방 전후사를 통해 가족이 헤어진 사람들 등에게 1948년 건국과 그 시기는 ‘잊고 싶은 상실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기억이란 매우 선택적이다. 처음 건국 60년 사업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일부 뉴라이트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존재했지만, 하나의 문제제기 이상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꾼다든지, 또 다른 ‘과거사 전쟁’을 예고하는 움직임, 관제동원 움직임 등은 일련의 의혹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 &amp;nbsp;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이처럼 건국 60년이 보수정치세력과 지식사회에 의해 ‘기억’으로 불러 올려진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먼저 1948년 제헌의회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좌파정권 10년’, ‘읽어버린 10년’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10년간 지식사회와 정치적 세력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를 빼앗겼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우파-분단정권의 기원인 48년 건국의 기억을 다시 불러올림으로써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되찾고자 한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다음으로 이른바 386의 ‘삐뚤어진’ 역사관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정권교체이후 각종 위원회를 통해 지난 군부 파시즘 시기 은폐된 역사의 규명, 희생자와 가해자의 진상규명 등이 부족하지만 진행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가해자인 정부에 의해 진정한 의미의 진상 규명이 가능한가, 논쟁적인 사건들이 국가의 기억으로 전유되는 것은 아닌가 등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실제 보상 과정에서도 피해자나 관련자들의 응어리를 풀러주기보다,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동안 망각과 침묵의 늪에 빠져있던 이들 기억을 불러온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현 정부와 뉴라이트론자들은 그간 10년의 과거사 논란은 좌파정권과 386세대의 ‘아비 죽이기’ 혹은 ‘왜곡된 국가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386 역사관의 ‘전면적인 수정’할 기치를 높이 들었다. 최근 발간된 &amp;lt;대안교과서&amp;gt;가 학술적 형태의 반응이라면, 건국 60년 사업은 ‘정부적 형태’의 조직화된 대응이 아닐까 싶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마지막으로 건국 60년 사업은 현재적인 알리바이가 존재한다. 이명박 정권은 두 차례 선거를 통해 ‘좌파 정권 10년’, ‘잃어버린 10년’이 평가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대선 직후 인수위원회가 보인 마치 80년 ‘신군부’같은 태도를 비롯해서, 각급 행정기관에서 진행된 지난 시기 실시한 적이 없는 행정수반의 ‘국정철학 강연’, 이전 시기 공공기관 기관장에 대한 노골적인 사퇴 압력과 퇴진, 최근 불거지고 있는 한국방송공사 사장 강제 퇴진 논란 등이 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5-6월의 촛불시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대중들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한 것도 아니며, 다시 한국 사회를 10년 전으로 되돌리라고 이들을 지지한 것 역시 아니었다. 촛불시위와 지지층 이탈, 그리고 핵심 국책사업인 대운하 등이 당장 실시되기 어렵자, 보수세력은 방향을 다른 쪽으로 튼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거사를 둘러싼 전면적인 공세이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STRONG&gt;민주적 공론장으로서 역사 논쟁&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나는 기존 현대사 해석에 대해 뉴라이트가 재논의를 하는 것 자체를 반대할 생각은 없다.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닌 정치세력이나 지식인 집단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는 한국만은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68혁명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40주년을 맞아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역사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자신과 다른 역사-해석을 일방적으로 ‘실패’ 혹은 ‘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이들 보수세력은 그 누구보다도 열렬한 ‘시장주의자’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역사와 역사해석 역시 정당한 ‘경쟁’을 통해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경쟁의 정신’이 아닐까?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만일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하고 ‘민주적 공론장’으로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 정당한 태도이다. 그러나 매우 불행히도 현 현 정부의 건국 60년 사업은 서로간의 차이를 용인(容認)하는 똘레랑스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적과 아’라는 냉전적인 대립 구도 하에서 한쪽만의 역사 해석만을, 한쪽만이 강요하는 기억만을 내세우고 있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거나 그 성과를 재해석할 수 있다. 다만, 이에 반하는 흐름을 전부 싸잡아서 ‘시대착오’, ‘좌파’ 등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또 다른 ‘마녀사냥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다. &lt;br /&gt;특정한 역사와 그 안에 개인, 인물에 대해 일방통행적으로 실패 혹은 성공을 강조하는 것은 80년대 이후 전개된 한국 현대사 연구 성과를 일순간에 완전 무시하고 뭉개버리려는 시도에 다름이 없다. 386이란 특정 세대의 역사관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다만 냉전 시기 획일화된 현대사 인식에 반하는 해석들이 지속적으로 누적된 것이 민주화 이후 20년간 축적된 한국 현대사 연구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건국 60년이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획일적인 해석이 아닌, 그 시대의 아픔, 고통, 피해, 희생 그리고 48년 이후 60여년을 살아온 다양한 한국인의 경험을 드러내고, 이것을 통해 그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바로 진정한 지적·도덕적인 헤게모니를 보수세력과 지식인들이 대중들로부터 얻고자 한다면, 상대의 역사인식을 인정하고 설득하려는 태도를 먼저 보여야 한다. 바로 민주적 공론장으로서 건국 60년 사업의 위치를 명확하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amp;nbsp; &amp;nbsp;&amp;nbsp;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lt;STRONG&gt;미래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대학시절 한참 사법적 판단의 소재였던 &amp;lt;한국민중사&amp;gt;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당시 글들은 비록 거칠지만 언젠가 승리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가정을 깔고 있지 않았나 싶다. 바로 운동을 위한 역사, 바꾸어 말하자면 역사 서술의 일정한 목적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 점이 이른바 뉴라이트론자들이 ‘386의 역사관’이라고 비판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하지만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또 다른 목적론을 ‘시대불가피론’이란 이름 하에 현재화 시키고 있다. 객관적 사실과 실증에 입각한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들은 박정희 체제와 근대화의 방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개인과 집단에 대한 분명한 태도, 즉 반대와 저항의 흐름은 그 자체로 근대화와 다가올 미래를 지체시키는 ‘지체요인’인 동시에 ‘역사적 반동’(historical reaction)으로 파악하고 있다. 저항세력의 주장은 당대 현실화될 수 없는 ‘자가당착적인’ 것인 동시에 미래를 퇴보시키는 ‘퇴영적인 당사자’들이라고 비판한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그러나 뉴라이트 역시 박정희 시기의 근대화와 다양한 민중의 희생과 탄압을 ‘특유의 내러티브 구조’를 통해 끊임없이 정당화시키려는 ‘세련된 해석자’일 따름이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방식의 정당화를 통해 현재의 국면 - 이들이 주장하는 ‘잃어버린 10년’과 ‘좌파 정권’의 부정과 실용주의에 입각한 부국강병 - 에서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를 선취하려는 ‘역사의 이용’(use of history)일 따름이다. 하지만 앞서 민중들의 파편적인 기억을 통해 뉴라이트 집단이 주장하는 불가피론이 최종적으로 도달할 길은 경제성장 이후 민중의 삶과 자유가 보장된 미래인데, 현실은 전혀 그럴지 않다. 베트남 참전병들은 아직도 용병의 멍에와 숨겨야 할 수 밖에 없는 병마 그리고 기약 없는 명예회복을 기다리며, 기지촌 여성은 여전히 매매춘 여성 혹은 사회 하단에서 막일로 연명하고 있다. 또한 도시 하층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무질서, 무지, 혼란의 상징으로 여기는 사회의 시각에 힘겨워 하며 하루 하루를 영위하고 하고 있다. 불확정적인 미래의 지속, 이것이 ‘뉴라이트 역사 인식의 딜레마’이다.&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size=2&gt;진정한 폭력은 공권력에 의한 물리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고와 상상력의 가능성을 제약하고 미래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 역시 폭력이다. 뉴라이트 그룹에게 미래란 늘 현재를 지연시키는 자기 암시적 주문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의 미래’는 지속될 수 없다. 근대화와 부국이라는 ‘하나의 미래’가 아니라 복수의 미래를 상상하고 그 속에서 현재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물결칠 때, 이제 박정희 시대와 뉴라이트의 미래는 종언을 고할 것이다. “그들의 미래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amp;nbsp;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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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category>건국60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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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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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4 Jul 2008 15:07:5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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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039;비근대적 민주주의&#039;의 가능성에 주목하자(이명원)</title>
			<link>http://jihaeng.net/blog/118</link>
			<description>&lt;DIV style=&quot;FONT: 10pt 굴림&quot; align=center&gt;&lt;STRONG&gt;&lt;FONT size=3&gt;&#039;비근대적 민주주의&#039;의 가능성에 주목하자&lt;/FONT&gt;&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이명원&lt;br /&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 문학평론가)&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lt;FONT size=2&gt;
&lt;DIV&gt;&lt;br /&gt;국민들은 승리한 것일까. 지난 7.5 촛불집회에서 발표된 국민대책회의의 선언문을 보면, 얼마간 그것은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촛불항쟁기를 거치면서, 국민들은 헌법에 명시된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대한 끝없는 학습과 토론을 거듭해왔다. 아직도 ‘공화국’이라는 말에서 ‘이적성’을 읽어내는 기묘한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로테스크하지만, 공화국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사실(‘民主’)이 의식적으로 재확인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주어 없는 민주주의’와 ‘기표소 민주주의’의 가면을 불사른 촛불&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촛불항쟁 이전, 우리들은 말 그대로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일고의 회의도 없이 당연한 진실로 간주해 왔다. 우리는 공화국의 ‘주인’으로서 ‘민권’을 표출․확인하고, 그것이 장애 없이 작동되는 것을 감시해야 할 민주적 권리와 의무를, 지금까지는 4년 만에, 또는 5년 만에 한번 돌아오는 ‘기표소 민주주의’로 오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촛불항쟁을 통해 비로소 재확인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분명한 ‘반면교사’였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다소 재미없는 표현을 쓰자면, 지금까지 우리는 대의제를 일체의 회의란 있을 수 없는 민주주의의 초월적 규범, 그러니까 일종의 공리(axiom)라고 할까, 아니면 사유의 빛이 도달할 수 없는 칸트 식의 물 자체(Ding an sich)로 간주해, 국민이라는 ‘주어(主語) 없는 민주주의’를 용인했을 때, 과연 어떤 위험이 국민들 자신에게 강림할 수 있는지를, 촛불항쟁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동시에 이 ‘주어 없는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국가권력이 정작 주권재민의 헌법적 가치가 실체화되고자 할 때, 어떻게 폭력적 국가기구를 총동원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지, 또 역사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한 바 있었던 ‘비국민-폭도’라는 배제 메커니즘을 통해, 주권자인 국민 에게 국가폭력을 감행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확인시킨 과정이기도 했다. 허다한 정치철학 이론서도 설득할 수 없었던, 민주주의의 근원적 가치와 ‘주어 없는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가면이 벗겨질 수 있었다는 것은 촛불항쟁의 커다란 의미 가운데 일부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래서 촛불 항쟁은 ‘주어 없는 민주주의’가 시청 앞 광장(은 물론이고 ‘광장’의 의미를 담고 있는 사이버 공간의 ‘아고라’)에서 국민이라는 ‘주어’를 다시금 재발견하고, ‘기표소 민주주의’의 허구성에 대해 예리하게 통찰하게 만들었으며, 정치적 주권자인 시민들의 권력에 대한 감시와 자기규율, ‘나날의 민주주의’의 개념구성과 그것의 필요성을 촉구하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나날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과 소비자 의식&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기묘하게도 거기에는 오늘의 심화된 자본주의가 주조해낸 ‘소비자 의식’도 한몫했다. 가령 사이버공간을 포함하여, 현실의 시장에서 비등하고 있는 이른바 ‘조중동 불매운동’이 그렇다. ‘기표소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주권은 ‘투표’행위를 통해 4년에 한 번 또는 5년에 한 번 주권의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상품 소비의 영역에서, 우리들은 ‘나날의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또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런 점에서 (불매운동을 포함하여) 소비자가 그간 무의식적으로 소비해 온 ‘정치상품’으로서의 특정 언론의 ‘가치’와 ‘질’을 문제 삼아 소비/불매의 준거로 삼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기표소 민주주의’가 제약하고 있는 투표행위의 ‘힘’을 시장이라는 ‘나날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응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분명한 정치적 함의를 내포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lt;녹색평론&amp;gt;의 김종철 선생이 어느 강연에서 언급했듯, 자본주의 시장체제에서의 상품의 선택과 소비는 그것 자체가 ‘나날의 민주주의’를 거듭 확인하게 만드는 투표행위다. 그런 점에서 시장에서의 소비행위는 가감 없는 나날의 국민투표다(정치상품까지도 그렇다). 그래서 어떤 라면과 신문이, 포털 사이트와 쇠고기가 이 ‘나날의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판매/불매되는가의 문제는 그래서 단순한 상품소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선거과정에 개입하는 유권자의 투표행위가, 그간 자각되지 않았던 시장의 영역에서까지, 오히려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체화되는 정치의 일부인 것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동시에 촛불항쟁은 ‘안전한 밥상’이라는 상식선에서 출발했지만, 광장에서의 대중의 직접행동과 학습을 통해서 다채로운 상위의제로의 고양을 이끌어냈다. 한반도 대운하, 교육과 의료공공성, 공기업 민영화, 한미 FTA 문제를 포함한 이 의제를 한 마디로 종합하면, 그것은 미래 세대가 살아가게 될 ‘좋은 삶’의 모델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맞닿게 된다. 이것은 박정희 식의 ‘잘 살아 보세’나 이명박 식의 ‘선진화’라는 낡아빠진 구호와는 질적으로 다른 미래형 의제의 필요성을 낳았다. 이명박 정권의 정책에서 국민들은 미래의 불확실성은 물론 현실적 지반의 붕괴가능성에 가감없이 전율했다. ‘촛불소녀’로부터 ‘촛불장년’에 이르기까지 형용할 수 있는 언어는 찾지 못했지만, ‘이건 아니다’라고 모두가 체감하고 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남져진 과제, 미래형 의제의 체계화&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러나 이어진 촛불항쟁에도 불구하고, 그런 미래형 의제가 체계화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부자되세요’를 권유하기보다 ‘행복하세요’가 더 가치 있는 권유로 체감되기 위해서는, 그렇기 때문에 경제발전을 포함한 ‘체제적 상상력’의 틀을 넘어서야 한다. 그럴 때 ‘비체제적 상상력’에는 이런 질문이 동반되어야 한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주장처럼,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질문, 그러니까 제로(zero) 성장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공생공락’의 문제설정과 의제들이 아직까지는 광장은 물론이고 지식인 그룹에서도 전혀 논의되고 있지 않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래서 이미 하나의 세계(one world)가 낳고 있는 문제들, 이를테면 화석연료의 고갈에 따른 오일피크와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식량부족의 문제, 지구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시장의 아노미에 대항할 수 있는 자립경제/농업의 문제, 토지의 사유화와 투기, 이와 연동되어 신경질적인 등락을 거듭하는 부동산 경제, 시간의 낙차에 근거한 비 물질 버튼 경제(button economy)로서의 증시의 불안정성 등을 포함하여, 구조적 파국을 초래할 것이 분명한 의제들에 대한 사유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둘러싼 논의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비근대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비체제적 상상력 필요&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동시에 현행 ‘대의제 민주주의’ 이전에도 오랜 세월동안 존재하였고, 현재에도 비교적 작은 커뮤니티에서 작동되고 있는 ‘비근대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창안(invention)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게 오랜 촛불항쟁을 거쳤으면서도, 가령 오늘의 대중들은 동학혁명기의 민중적 자치기구로서의 ‘집강소’ 모델이나, 두레공동체의 운영원리, 또는 ‘폐정개혁안’ 등에서 볼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기구와 이념에 대한 영감을 찾고 있지 못하다. 현실의 제도정치 전반에 대한 실질적인 ‘탄핵’의사가 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장의 축제에서는 이를테면 상징적인 차원에서의 ‘그림자 정부’(shadow cabinet) 구성의 정치풍자조차 보이지 않는 것은, 체제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인문정치의 부재를 환기시키는 대목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촛불을 꺼라. 아니다. 끈질기게 이어가자”라는 말들이 많지만, 촛불의 입장에서는 조급할 필요도, 피로감을 느낄 이유도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든, 아니면 단지 공상에 그치는 것이든, 이 광장의 열기 속에서 우리들이 더욱 활성화시켜야 하는 것은 ‘체제적 상상력’의 중력을 넘어선 ‘비체제적 상상력’과 ‘인문정치’의 구상이다. 이제 촛불항쟁은 정치공학을 넘어선, 이 장엄한 인문정치의 상상력과 무중력 공간의 발랄한 유머감각을 필요로&amp;nbsp; 하고 있다. &amp;nbsp;&lt;/DIV&gt;&lt;/FONT&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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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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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7 Jul 2008 17:49: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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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과연 좌파는 대중운동에서 무능한가?(김정한)</title>
			<link>http://jihaeng.net/blog/117</link>
			<description>&lt;DIV&gt;과연 좌파는 대중운동에서 무능한가? &lt;br /&gt;&lt;/DIV&gt;&lt;br /&gt;
&lt;DIV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김정한(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lt;/DIV&gt;&lt;br /&gt;&lt;br /&gt;촛불이 켜질 때 처음부터 외통수였다. 정국 타개책은 재협상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협상을 받아들이는 대신 적당히 손을 대는 선에서 무마를 시도할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추가 ‘논의’를 통해 적당히 손을 대지 않는 쪽을 택했다. 이것은 악수(惡手)도 아니었다. 이 게임 판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수였다. 이명박 정권은 가능한 유일한 수라고 강변했지만, 촛불시위를 통해 뒤바뀐 게임의 규칙에서 애초부터 그것은 가능한 수로 인정될 수 없었다. 성마르고 무지한 지배세력에게 남은 방법은 이 판 전체를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지난 주말 이명박 정권이 자행한 잔혹한 폭력 진압은 판을 깨서 외통수를 물리려는 필사적인 광란이었다. 그들도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권력이 그들의 손을 빠져 나가고 있음을. 그래서 폭력을 통해 빠져나가는 권력을 어떻게든 일단 붙들어 놓겠다는 어리석은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lt;br /&gt;&lt;br /&gt;이것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lt;br /&gt;&lt;br /&gt;얼핏 보면 이상하게도 좌파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그토록 기다려온 대중들이 거리에 나타나자 이 대중들을 평가하기에 바빴다. 대중들 속에서 대중들과 함께 싸우고 그 흐름에 작은 물줄기를 내서 ‘한걸음씩’ 더 멀리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대신, 대중들과 거리를 둔 채 이들이 과연 누구인가, 여기에 비판적 사고를 집중시켰다. 왜? 실천이나 행위가 아니라 해석이나 평론에 기울었다는 것은 전혀 핵심이 아니다. 좌파에게, ‘이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 대중들은 그들이 기다리던 대중들이 아니었다. 대중들 없이 척박한 지형에서 사회운동을 전개해온 좌파에게 비로소 도달한 대중들은 정치적 주체에 미달한 듯 여겨졌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를 위해 꿋꿋하게 싸워온 좌파에게 대중들은 기껏해야 단편적인 사고와 즉자적인 행동, 거품처럼 사그라질 듯한 일시적인 자발성의 분출에 불과했다. 거리의 정치와 일상의 정치를 구분하고 일상의 정치에서도 과연 이 대중들이 정치적 주체로 정립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때, 좌파의 비판적 사고는 대중들과 일정한 거리를 취한다. 이것을 좌파의 무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좌파와 대중들의 간격은 좌파의 무능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대중들 없이 싸워온 좌파의 오랜 투쟁과정에서 유래한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좌파의 이론적·실천적 이데올로기는 어느 순간 갑자기 거리로 뛰쳐나온 대중들의 그것과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좌파의 이데올로기는 물론 문자 그대로 대항이데올로기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촛불시위에서 대한민국의 주권, 민주공화국 등 지배이데올로기를 반복·변주할 뿐인 대중들을 어떻게 순순히 신뢰할 수 있겠는가. &lt;br /&gt;&lt;br /&gt;이데올로기적 반역 &lt;br /&gt;&lt;br /&gt;그러나 대중들은 무엇으로 반역하는가? 대중운동이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폭발하듯이, 이미 보편성을 획득한 지배이데올로기가 아니라면 대중들이 그 속에서 모순을 인식하고 투쟁할 수 있는 별도의 준비된 대항이데올로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좌파가 기다리는 그런 대항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순수한’ 대중들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촛불시위의 이데올로기는 물론 지배이데올로기이다. 대한민국을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예비군복을 입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적 반역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지배이데올로기를 대항이데올로기로 교체하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상징적 좌표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촛불시위를 통해 변화한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의 상징적 좌표가 일부는 근본적으로 일부는 소소하게 변화했고 계속 변화하고 있다. 이렇게 상징적 좌표가 변화함으로써 기존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의 공간이 열린다. 게임의 규칙이 달라지고, 불가능한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권이 누차 말하듯이 재협상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두 달 전이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재협상이 결코 불가능한 것들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좌파는 지배이데올로기를 매개로 상징적 좌표를 변화시키는 이런 대중운동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하며, 기꺼이 그런 정치적 주체에 ‘미달’하는 대중들의 일부가 되길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좌파의 기본적인 태도는 벤야민이 말했듯이, “혁명의 지도자에게 대중이 아주 중요하다면, 지도자의 가장 큰 업적은 대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에 자신을 거듭 편입시킴으로써 항상 그 대중을 위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데 있다.” 덧붙이자면, 맑스의 말처럼 그 가장 ‘단호한’ 일부가 되는 데 있다. &lt;br /&gt;&lt;br /&gt;상징적 좌표의 변화를 법적·제도적 변화로 &lt;br /&gt;&lt;br /&gt;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기막힌 시점에서 벤야민의 이 말을 행위로 만들어냈다. 그들의 연설과 행진에서 감동을 받은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한 친구의 말처럼, 누가 먼저 브레이크를 밟을 것인가, 누가 먼저 더 큰 희생자를 낼 것인가를 내기에 걸고 이명박 정권과 촛불시위가 정면으로 질주하는 상황에서, 사제단은 다른 물줄기를 창출했고 촛불을 보호하고 지속시키는 큰 몫을 해냈다. 그러나 이런 정세 변화는 약이면서 독이다. 지난 6월 10일 명박산성에 가로막힌 촛불시위에서 확인된 것은 ‘돌파구’가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이후 여러 시국토론회에서 결국 다시 확인한 것도 이것이었다. 상징적 좌표는 변화했으나 법적·제도적 변화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태의 지속. 혹자는 상징적 좌표의 변화를 찬미하는 데 머물렀고, 혹자는 굳이 법적·제도적 변화로 나아갈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상징적 좌표의 변화는 두 말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중요하며 큰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는 차후에 솟아날 새로운 정치의 잠재태가 있다. 그러나 법적·제도적 변화를 통해 그것을 일정하게 현실화시킬 수 있는 틀을 구성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이 대중운동의 소멸 이후에도 전개될 사회운동과 다음에 일어날 대중운동에게, 그리고 다시 일상에서 살아갈 시민들에게 주어지는 커다란 ‘선물’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진보신당과 일부에서 제기한 재신임 국민투표는 그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중들은 이것을 적극적으로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듯이 이명박 정권의 퇴진을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이후를 책임질 대안적인 정치세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안적인 정치세력의 빈곤이 현 촛불의 진로에서 가장 큰 장애물인 셈이다. 중요한 국면에서 사제단이 그 역할의 일부를 대신한 것은 다행스럽다. 그러나 당연히 사제단은 정치세력이 아니라 종교세력이며, 이런 이유로 촛불의 지평이 종교 담론의 틀에 갇힐 위험성이 존재한다. 지금 정세에서 비폭력과 평화는 전술적으로 인정될 필요가 있으며, 굳이 원론적인 차원에서 비폭력의 한계를 논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사제단은 법적·제도적 변화를 추동하는 데 한계가 있고, 이미 이뤄낸 상징적 좌표의 변화마저도 종교 담론의 틀에서는 그 의미 지평이 기존 좌표로 일정하게 퇴행할 수도 있다. 소박한 믿음과는 달리, 대중운동에서 진화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 여러 좌파 세력들이 연합을 이뤄 대중들이 신뢰할 수 있는 조직체를 형성하고, 대중운동이 흘러갈 새로운 물줄기를 대는 역할을 수행하길 기대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것일까? &lt;br /&gt;&lt;br /&gt;굿바이, 2MB &lt;br /&gt;&lt;br /&gt;사제단은 이명박 정권의 폭력 진압을 막아내는 중요한 역할을 개시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사제단이 대중들의 마음을 아주 정확히 읽어냈기 때문이다. 냉소적인 사람들에게조차 미움과 분노를 일으켜 슬픈 정념을 확산시키던 잔혹한 상황은, 사제단의 행위를 통해 위로와 자긍심, 평화와 사랑으로 변화되었다. 촛불은 더 멀리 퍼질 것이고, 아마도 오는 7월 5일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새로운 기념일로 새겨질 것이다. 좌파는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해서 되새기며 여기서 진행된 정치에 관해 가능한 많은 것을 흡수해야 한다. 2MB는 대중들의 마음을 전혀 읽지 못했다. 그때그때 뻔한 사기술로 소나기만 피하고 상대가 누그러진 듯 보이면 즉시 말을 뒤집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폭력의 강도를 더 높이는 것뿐이지만, 이것은 곧 자신을 옥좨는 자승자박이 될 것이다. 이미 그에게서 권력의 정당성은 사라졌고, 대중들은 그를 믿지 않으며, 그 주변에서 한 자리씩 차지한 인물들, 한나라당의 의원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명박 정권은 끝났다. 법적·제도적 절차가 남아 있고, 이런 절차는 더 늦춰질 수만 있을 것이다. 굿바이, 2MB.&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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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2 Jul 2008 10:49:0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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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식인은 촛불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가(오창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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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align=center&gt;&lt;STRONG&gt;&lt;FONT size=4&gt;지식인은 촛불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가&lt;/FONT&gt;&lt;/STRONG&gt;&lt;/DIV&gt;
&lt;DIV align=center&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lt;FONT size=2&gt;&lt;FONT size=3&gt;김우창․최장집, 합리주의에&lt;/FONT&gt; 갇혀 자발적 정치 참여 억압 …&lt;/FONT&gt;&lt;FONT size=2&gt;생명의 정치로 나아가는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돼야&lt;/FONT&gt;&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오창은 &lt;br /&gt;(대안지식연구회&amp;nbsp; 연구위원/ 문학평론가)&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lt;STRONG&gt;현란한 언어의 향연&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가난해도 희망이 있는 나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라, 땀 흘려 노력한 국민이면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보장되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합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우리 국민 모두가 농어민의 아들딸입니다. 농업, 농촌, 농민 걱정이 곧 나라 걱정입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어떤 경우든 친환경, 친문화적 기조를 유지하여 국토의 건강성과 품격을 높여나가겠습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밝힌 내용이다. ‘농민에 대한 사랑’, ‘친환경․친환경’, ‘가난해도 희망이 있는 나라’라는 구절구절이 따스하다. 그 중 ‘가난해도 희망이 있는 나라’라는 구절은 ‘행복의 조건’에 대한 성찰을 자극한다. 경제발전이 최우선인 것처럼 여겨지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경제 대통령’이라고 지칭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에 이런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의외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 취임사의 문구는 한미 FTA를 포함한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강조하는 현정부와는 어울리는 않는다. 더구나, ‘미국 쇠고기 수입 개방’ 상황과 대비해 볼 때, 이 구절은 수사적 울림만이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뿐이다.&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취임사의 현란한 언사와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의 괴리를 보면서, 과연 어떻게 이 문안이 작성되었는가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8700장 분량의 취임사는 류우익 대통령실장과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등 실무진이 작성했다고 한다. 이를 송호근(서울대 교수)․권영빈(전 중앙일보 사장),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박세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서지문(고려대 교수)․배규한(국민대 교수)․변희재(인터넷칼럼니스트)․김범일(가나안농군학교장) 등이 자문을 했다. 조금은 정치적 입장과 세계에 대한 태도가 다를 수 있는 이들이 자문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 중 김우창 교수가 자문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의외였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사의 일부는 김우창 교수의 손길이 스민 것처럼 여겨진다. 특히 최근 김우창 교수가 ‘생태친환경적 미래’를 강조한 것과 ‘친환경, 친문화적 기조’의 어구는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선거를 통한 국민의 합의에 의해 탄생한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취임사’ 기초 작업에 존경받는 지식인이 참여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취임사가 개인의 포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국정운영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김우창 교수의 참여가 왠지 섭섭하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자아낸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김우창 교수는 존경받는 문학평론가일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변화에도 비교적 초연한 채 사회적 발언을 해 왔던 분이다. 김우창 교수는 1960년대부터 한국문학비평에 기여했고, 평론집 [궁핍한 시대의 시인](1977)은 시대와 문학의 관계를 일제 강점기의 문인들을 포함해 여러 문인들의 작업에 빗대어 탐구한 의미있는 책이었다. 김우창 교수는 그 필력과 사유의 깊이가 만만치 않은 힘을 발산하는 지식인이며, 지금도 여전히 후학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래서 김우창 교수에 대한 후학들의 비판은 더욱 예리해야 한다.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lt;STRONG&gt;김우창 교수의 &#039;합리주의 함정&#039;&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김우창 교수는 5월 22일 &amp;lt;경향신문&amp;gt;에 ｢쇠고기, 국제협정, 정치와 정치 너머｣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김우창 교수는 ‘사회관계, 국제관계의 상식으로 보아 재협상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김우창 교수의 태도는 합리주의에 입각한 가치중립성을 견지했다. 그래서 이번 정부의 쇠고기 협상을 ‘이익 교환의 실패’로만 바라보고 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김우창 교수는 쇠고기 문제의 해결책으로 한국 수입업자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제안했다. 즉, 수입업자에게 “원산지나 소의 나이 등을 명시”할 것을 “법적으로 요구”하고, 더불어 “소비자 운동 등을 통해” 자율규제를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이른바 정부가 주장하는 ‘자율규제’와 너무도 흡사하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김우창 교수의 글은 다음 몇 가지 부분에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그는 “이루어진 일에 입각하여 거기로부터 헤쳐 나갈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정부가 잘못된 협상으로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킨 것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다. 문제는 정부가 ‘미국 쇠고기 수입’을 잘못된 협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잘못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국민의 역할이다. 그것을 괄호 친 채 시민사회가 책임을 떠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잘못된 협상은 협상대로 인정하고, 한국 시민 사회가 ‘자율규제나 소비자운동’ 등으로 책임만 떠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다음으로, 김우창 교수가 단지 쇠고기 협상을 국가 간 협상으로만 바라본 것도 문제가 있다. 그는 “거래나 협상이란 이쪽에도 이익이 있고 저쪽에도 이익이 있”는 것이라면서, 설마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희생”하려고 했겠느냐고 옹호한다. 또한 미국도 “인간적 희생을 완전히 무시하고 쇠고기를 강매”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이는 온정주의적 태도로 정부의 협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국가 기구는 가치중립적이지도, 원천적으로 공익적이지도 않다. 어떤 권력(주권)이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국가기구에 자본의 이익이 작동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지금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가 간 이익의 손익계산 차원에서 한미 FTA와 쇠고기 협상이 이뤄졌다고 보지 않는다. 한미 양국의 정부는 특정 자본의 이익과 밀착된 상황에서 자국 자본의 이익을 계산하며 협상에 임하고 있다. 그 자본의 싸움 와중에는 ‘생명과 건강’이 희생되기도 하는 무자비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는 끊임없이 공공성을 희생하는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우창 교수는 단지 국가의 협상과 협정으로 사태를 바라보면서 너무도 안이한 태도로 ‘쇠고기 협상’을 이해하고 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그리고 김우창 교수는 촛불집회를 바라보면서도 “중․고등학생 또는 더 어린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긍정적인 일일까?”라는 미심쩍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질문의 방식 은 이명박 정부가 제기하는 ‘배후론’과 닮아 있다. 김우창 교수는 미성년자의 인간적 능력의 미숙함을 거론하면서 “자라나는 세대는 일정한 보호구역에서 정치로부터 거리”를 가지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도 본말이 전도된 보수주의적 시각이다. 잘못된 협상으로 인해 문제를 야기한 정부를 질타하기 이전에 적극적으로 문제제기에 나선 중․고등학생에게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지는 것이 올바른가? 더군다나 중․고등학생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사안은 일종의 정치공방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았다. 사회적인 현안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에 연령과 세대의 구분이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청소년기의 정치적 자기결정권을 억압하는 것이 청년기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lt;STRONG&gt;최장집 교수의 &#039;대의민주주의&#039;만이 촛불을 구원할 수 있는가&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김우창 교수의 촛불집회에 대한 인식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존경받는 지식인으로 꼽히는 최장집 교수의 논의도 토론이 필요하다. 최장집 교수는 6월 17일자 &amp;lt;경향신문&amp;gt;에 실린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라는 글에서 “무책임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촛불정국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현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최장집 교수의 논의는 ‘촛불집회를 비정상 상태’로 바라보는데서 출발한다. 정상적인 상태는 대의민주주의에 기반해 ‘대표의 선출과 통치의 위임’이 이뤄지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선출된 대표가 ‘책임의 원리’를 구현하는 것을 지칭한다. 최장집 교수는 촛불집회가 이러한 책임의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민사회 의사를 결집하고 항의를 조직해 권위주의적 권력행사․정책결정에 결정적 제약”을 가하고 있기에 민주주의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하지만, 촛불집회 이후를 생각하는 최장집 교수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현대민주주의가 대의제민주주의라는 점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면서 그는 “시민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이익․요구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 결사체들을 통해 최대한 광범하게 정책 과정에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정당정치로 인해 파생된 문제를 정당정치로 수렴하자는 해결하자는 것과 같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최장집 교수의 주장은 ‘제도정치’에만 갇혀 있기에 문제가 있다. 최장집 교수는 “사회적 갈등이 처리되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운동에 대한 필요는 그만큼 적어진다”고 본다. 즉, 대의민주주의 제도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촛불집회와 같은 사회운동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학자 그룹에 속하는 최장집 교수가 ‘대의민주주의 제도’만이 최선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제도는 끊임없는 대중의 요구와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어 왔다. 완전한 제도는 없으며, 항상 불완전한 제도가 시대적 상황에 따른 주권자들의 요구 속에서 변경되어 왔을 뿐이다. 현재, ‘미친소 사건’도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정당제도와 같은 제도정치 속에서 해결될 수 없었기에 광장의 정치가 이뤄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광장의 정치가 요구하는 제도의 변화를 주목하지 않은 채 제도정치로의 수렴의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다. 오히려 정치학자는 ‘광장의 정치인 촛불 집회’의 요구를 수용할 만한 새로운 제도의 변화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이 올바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다음으로, ‘촛불집회’로 일컬어지는 사회운동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시선은 보수적 면모를 내비치고 있어 위태롭다. 최장집 교수는 ‘촛불집회’와 같은 운동이 1) 대안 형성이 어렵고, 2) 이슈의 위계질서를 세워 일상적으로 정책을 추구하기 힘들며, 3) 정책 이슈 때마다 거리 시위에 나설 수 없는 일이고, 4) 장기적 유지될 수 없고, 5) 시민사회 내 갈등을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분석으로서는 올바를 수 있으나, 대의정치로의 수렴을 주장하는 근거로서는 정당하지 않은 논거들이다. 이는 현재의 상태를 ‘정상에서의 일시적 일탈’이냐, 아니면 ‘비상사태’로 보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시각 차이이기도 하다. 정당질서와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비상사태’를 수습할 수는 없다. 군주제 시절에도 시민의 동의는 실질적이든, 형식적이든 요구되었다. 국가는 시민의 동의 없이 운영될 수 없다. 그런데, 민주주의적 질서 속에서 시민의 동의가 이뤄지지 않은 정책이 강압적으로 추진되고 있고, 시민의 저항에도 무심할 뿐이니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동의의 원칙’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의민주주의의 복원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최장집 교수의 태도는 ‘교과서적 강박’일 뿐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더 큰 문제는 최장집 교수의 시각이 현 상황을 오로지 정치영역 만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다는데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는 정치질서에 대한 반대의사 표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를 중시하는 일상인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검역주권을 포함해, 건강권․생명권을 요구하는 시민의 저항을 단지 ‘정치 투쟁’으로만 수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범위한 영역에서 생명의 정치, 일상의 정치, 광장의 문화정치가 싹트고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가능성을 제도정치라는 온실 속으로만 옮기려는 것이 온당한 것인지 반성해야 한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희망은 원래 낯선 것이었다&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최근 지식인 사회에서 촛불집회의 의미를 과장하지 말자는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중산층 엘리트 지식인 사이에서 촛불시위의 새로움을 과장하고 있다’(박상훈)는 의견도 있고, ‘촛불집회는 자연발생적으로 태동한 현상인 만큼 자연스럽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정해구)의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지난 6월 21일에는 한미 쇠고기 추가 협상에 따른 결과가 발표되었다. 쟁점이 되었던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금지 조치는 ‘미 농무부의 품질시스템평가(QSA) 프로그램’에 내맡겨졌고, 일부 쇠고기의 위험부위 수입이 차단되었으며, 한국 정부의 검역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선에서 추가협상은 마무리 되었다. 이명박 정부에 의해 추가협상 결과는 자화자찬되고 있는 실정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지식인들은 촛불집회를 통해 일상의 생활정치가 변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성찰하고(김원), 제도정치의 종언을 통한 삶의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며(이명원),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탐색’의 필요성(하승우)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진취적인 면모는 김우창․최장집 교수의 일면 보수적인 태도와 대비된다.&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간단히 말해서, 촛불집회에 나선 시민들은 일상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명권․건강권을 확대해 나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는 그간 공공성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국가기구들이 오히려 ‘주권자의 저항’을 무시하고 있는 현실에서 새로운 자각이기도 하다. 촛불집회는 ‘정치적 저항’이라기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시민 연대’이다. 이 고귀한 실천 행위가 단지 이성적 질서로 귀환하지 않는, ‘감성의 교감과 연대’로 이어질 때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민주적 질서가 창출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진화하는 촛불집회를 놓고, 지식인 사회는 ‘덜 진화한 학습노트’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현재, 촛불 집회의 현장에서 구현되고 다양한 정치적․문화적 실험들은 제도정치가 ‘새로운 제도로 변신’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애당초 ‘농민에 대한 사랑’, ‘친환경’, 그리고 ‘가난해도 희망이 있는 나라’와 같은 청사진은 대통령 취임사에 어울리는 문구가 아니었다. 희망은 ‘촛불집회와 같은 광장의 직접 행동’을 통해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질 때, 그 언어에 찬란한 후광(aura)이 쓰일 수 있다. 희망은 원래 이전까지 없었던 낯선 것에 대한 &#039;미래 이미지 만들기&#039;인 것이다.&lt;br /&gt;&lt;/DIV&gt;&lt;/DIV&gt;&lt;/DIV&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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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16</guid>
			<comments>http://jihaeng.net/blog/116#entry116comment</comments>
			<pubDate>Tue, 24 Jun 2008 12:10:0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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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안전한 쇠고기, 이제 대안을 이야기하자(이영제)</title>
			<link>http://jihaeng.net/blog/115</link>
			<description>&lt;DIV style=&quot;FONT: 10pt 굴림&quot; align=center&gt;&lt;STRONG&gt;&lt;FONT size=3&gt;안전한 쇠고기, 이제 대안을 이야기하자&lt;/FONT&gt;&lt;/STRONG&gt;&lt;/DIV&gt;
&lt;DIV align=center&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이영제&lt;/FONT&gt;&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size=2&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 정치학 박사)&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lt;FONT size=2&gt;
&lt;DIV&gt;&lt;br /&gt;&amp;nbsp; &lt;STRONG&gt;대의 민주주의와 제도 정치의 퇴장을 준비해야 하는가?&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축제의 장이자 저항의 장이 되어버린 촛불시위는 대의 민주주의와 제도 정치의 한계와 위기를 가감 없이 드러내 주고 있다. 갈수록 늘어나는 촛불에 비례하여 직접 행동, 직접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찬가도 늘어나고 있다.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경고가 누적되어 있는, 20여 년 전의 권위주의 통치를 대체한 ‘민주주의’에 대해 촛불축제를 바라보는 많은 지식인과 언론들은 조심스럽지만 신속하게 퇴장카드를 꺼낼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구시대의 민주주의가 퇴장하기도 전에 이미 등장한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객관적 기대와 주관적 ‘바램’이 혼재된 결과이기도 하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 &lt;STRONG&gt;새로운 주체들의 유쾌한 정치실험&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새로운 민주주의 또는 새로운 정치는 낡은 ‘민주주의’와 정치를 지탱하고 있는 각종 법률과 제도, 정당·정치인과 유권자, 기업과 노조 등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고 있다. 과격하면서도 지극히 수동적이고 이해타산적인 구 주체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주체로 일컬어지는 대상은 촛불소녀, 유모차 부대, 예비군, 각종 동호회 구성원들로 기존의 정치에서 소외되었거나 비정치적이었던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자발적 참여자들이다. 이들은 시간과 장소, 권력을 통제를 넘어서 아고라를 창출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공공선을 도출한다. 따라서 지도부도 없고, 방향도 정해져 있지 않다. 새로운 주체들의 유쾌한 실험은 촛불축제가 증명하듯이 성공적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 &lt;STRONG&gt;촛불시위는 분할통치의 역설&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온·오프라인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거대한 촛불행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토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모아진다. 어디로 행진을 할 것인가, 해산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경찰의 저지선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 등이 그것이다. 촛불시위가 광우병 쇠고기 수입 문제를 넘어 대운하, 미친 교육, 민영화 등 다양한 이슈와 ‘재벌’ CEO 스타일의 무식한 통치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로 발전하고 있지만 이들은 광우병 쇠고기의 연장선에 있다. 한미FTA, 대운하, 교육자율화를 통해 적과 동지를 구별하려던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 문외한답게 모든 국민들을 동일한 위기에 몰아넣는 어리석음을 범함으로 민주주의의 새로운 맹아를 맛보게 해주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 &lt;STRONG&gt;아고라의 한계와 아우성&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기술의 발달로 인해 다양한 아고라들이 시간과 장소, 권력의 통제를 초월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간접적인 접촉조차 힘든 엄청난 인구수와 날로 복잡성이 증대되는 다양한 이슈들의 등장, 복수의 공적인 가치의 출현 등은 아고라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자발적인 토론의 장이 아니라 대중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찬 성토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광우병 쇠고기에서 대운하로, 교육문제로, 공기업민영화, 의료, 세금, 비정규직, 환경, 젠더, 소수자 문제 등으로 이슈가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아고라는 아수라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단일한 이슈가 아니라 다양한 이슈가 병렬적으로 배열되고, 모두의 이익이나 관심사가 아닌 차별과 차이라는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다양한 민주주의의 과제 앞에서도 과연 촛불소녀와 예비군, 유모차부대들은 함께 축제를 벌일 수 있을까?&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 &lt;STRONG&gt;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인가 주체의 위기인가?&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민주주의가 위기에 직면하지 않은 적은 없다. 한쪽으로는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다른 한쪽에서는 보다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한 민주주의는 지속되는 위기에 직면해 왔다. 탄생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 역시도 민주주의 일반과 다르지 않게 일상적인 위기에 맞닥뜨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 것일까?&lt;br /&gt;&amp;nbsp;이명박 대통령의 광우병 쇠고기 수입과 마찬가지로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 파병도 경제발전과 한미동맹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초헌법적 선택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 국민의 생존권을 대가로 했다는 것과 이명박 대통령이 조금 더 뻔뻔스러웠다는 것 밖에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니 진보니 하면서 진보를 능멸한 것을 감안한다면 양자의 유일한 차이는 나의 생존권인가 남의 생존권인가 하는 것 밖에 없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새삼스럽게 위기에 처한 것은 대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놀란 민주주의의 새로운 주체들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lt;STRONG&gt; 안전한 쇠고기와 안전한 정치에 만족할 것인가?&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작금의 위기는 대의 민주주의, 제도정치의 유효성이 완전히 소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도와 인민들 사이의, 제도를 장악한 정치 세력과 인민들 사이의 간극이 급격하게 너무나 많이 벌어졌기 때문에 발생했다. 촛불행진에 나선 시민들이 요구하는 것도 이것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안전한 쇠고기에 대한 욕구는 안전한 정치에 대한 욕구로 발전하고 있다.&amp;nbsp; 그러나 이들은 대안을 조직하는 좋은 정치의 생산자이기 보다는 여전히 정치 소비자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내일이면 일터로, 학교로, 가정으로 돌아갈 이들이 일상적으로 좋은 정치를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은 좋은 정치의 생산자로 나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독과점적인 정치시장에 파열음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기서 제도개혁이 만들어내는 위력은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비례대표의 확대와 내각책임제로의 전환은 보다 다양하고 책임있는 생산자를 만들어 낼 수 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대의 민주주의와 제도 정치의 위기를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민주주의가 해소해줄 것으로 기대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멀리 있다. 87년 민주항쟁의 결과가 정치 생산자와 소비자를 분리시키는 것이었다면 08년 촛불항쟁의 결과는 정치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일치시키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lt;br /&gt;&lt;/DIV&gt;&lt;/FONT&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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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15</guid>
			<comments>http://jihaeng.net/blog/115#entry115comment</comments>
			<pubDate>Sat, 14 Jun 2008 16:12:08 +0900</pubDate>
		</item>
		<item>
			<title>촛불의 아름다움과 대안의 삶(하승우)</title>
			<link>http://jihaeng.net/blog/114</link>
			<description>&amp;nbsp;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center&quot;&gt;촛불의 아름다움과 대안의 삶&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righ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right&quot;&gt;하승우(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촛불문화제, 촛불집회, 촛불시위, 촛불행진, 이제 촛불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그 모든 것이 아름다움을 띠고 있다. 으스름한 저녁시간을 지나 깊은 밤, 해 뜨는 새벽으로 이어지는 촛불의 시간은 한국의 정치미래를 살아있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정당이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갈 아무런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면, 시민들의 행진은 그 답이 드러나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무능한 제도정치의 종언을 선언하는 삶정치의 출현을 선언하는 주장(이명원)은 현실의 맥을 정확히 짚었다.&lt;/SPAN&gt; &lt;/P&gt;&lt;br /&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번 촛불행진은 제도정치의 무능함만이 아니라 권력의 폭력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고, 그와 함께 시민저항의 ‘아름다움’ 역시 증명하고 있다. 이런 저항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비폭력’이라는 말로 한정될 수 없다. 이번 촛불의 비폭력은 단순히 공격적인 말이나 행동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음만을 뜻하지 않았다. 비폭력을 외치는 목소리는 버스와 물대포, 소화기라는 물리적인 폭력에 맞서 저지되었지만 그 마음의 힘은 그런 장애를 넘어 넓게 퍼지고 있다. 그래서 경찰의 폭력이 거세질수록 촛불행진에 동참하려는 시민들의 마음은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lt;/SPAN&gt; &lt;/P&gt;&lt;br /&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런 아름다움 속에서 정부권력의 추함이 분명해지고 있고,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의 발언은 그 추한 악취를 멀리 퍼뜨리고 있다. 애초에 정부라는 것이 소수의 이득을 위해 다수를 억압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폭력적일 수밖에 없지만, 지금의 폭력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철저히 짓밟고 묵살하겠다는 자세이기 때문에 ‘노골적인 폭력’이라 얘기할 수 있다. 누가 추한 것들과 손을 맞잡거나 그것을 비호하려 할까?&lt;/SPAN&gt; &lt;/P&gt;&lt;br /&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제 시민들의 저항은 그 권력의 추함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확산되고 있다. 행진을 가로막는 그 지긋지긋한 경찰버스에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 의거해 전 민중의 힘으로 ‘견인’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라는 불법주차딱지가 붙는다. 폭력을 행사하는 무시무시한 경찰이 마이크를 잡거나 버스에 오르면 “개인기”, “노래”, “춤춰라”며 그들을 머쓱하게 만든다. 이런 촛불의 ‘유머’는 저항의 아름다움을 더욱더 돋보이게 한다.&lt;/SPAN&gt; &lt;/P&gt;&lt;br /&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젠 정부가 사안을 조작하기도 어렵다. 사실 걱정을 많이 했다. 80년 광주가 87년 6월 항쟁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면, 그 승리는 91년의 정원식 총리폭행(?)사건, 유서대필사건으로 대표되는 조작사건을 불러왔다(비록 무능한 권력이지만 경험을 통해 학습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다시 그런 조작이 시도되지 않을까? 실제로 배후세력을 운운하며 그런 시도가 있었지만 시민들의 손에 들린 핸드폰과 디카, 캠코더는 그런 걱정을 깔끔히 씻어 줬다.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는 시위현장의 속보는 조작은커녕 행진에 더 많은 시민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했다. 심지어 그 누구도 쉽게 장담하지 못했던 조중동의 변화까지 이뤄내고 있다. 촛불의 ‘속도’는 조작의 속도를 능가했다.&lt;/SPAN&gt; &lt;/P&gt;
&lt;br /&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P&gt;&lt;/SPAN&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두 가지 과정만 남았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제 시민의 아름다운 저항은 두 가지 과정만 남겨놓고 있다. 첫 번째는 바로 ‘승리의 경험’이다. 지금 정부가 여러 가지 화해와 타협의 제스처를 보이고 있는 것은 그 경험을 빼앗기 위해서이다. 한번 싸워서 이겨본 사람은 쉽게 절망하지 않고 다음의 승리를 가져올 자신감을 가진다. 이 경험만 가질 수 있다면 촛불행진은 쇠고기를 넘어 FTA, 대운하, 민영화, 비정규직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lt;/SPAN&gt; &lt;/P&gt;&lt;br /&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두 번째는 승리의 쾌감이 ‘자신에 대한 성찰’을 덮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지난번 칼럼에서 김원 연구위원은 대중의 역동성 속에 감춰진 민족주의와 힘의 논리를 지적하며, 과연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는 경쟁, 신분상승의 가치를 반성할 수 있을지를 지적했다. 나는 이 지적에 공감한다. 무엇이 우리를 지금과 같은 끔찍한 상황으로 몰고 왔는지를 곰곰이 돌이켜보아야 한다.&lt;/SPAN&gt; &lt;/P&gt;
&lt;br /&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P&gt;&lt;/SPAN&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공생의 정치와 대안의 삶&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거리는 뜨겁게 달궈져 있지만 일상의 장은 여전히 차갑게 식어 있다. 학교는 아이들을 가두며 ‘선생님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끔찍한 멘트로 아이들을 길들이려 하고 있다. 기륭전자는 1,000일, KTX여승무원은 800일, 이랜드 노동자들은 300일을 넘기며 싸우고 있지만, 자본은 일터를 꽁꽁 닫고 있다. 경쟁과 사교육시장을 부흥시키는 가족주의는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lt;/SPAN&gt; &lt;/P&gt;&lt;br /&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거리로 ‘뛰쳐나온’ 정치적 잠재력은 이런 일상의 장을 변화시켜야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촛불 속에서 사람들의 욕망이 자연스레 진화할 수 있을까? 나는 ‘풀뿌리 보수주의’라는 표현에 섣불리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욕망구조가 깨지지 않는 건 사람들 개인의 탓이기도 하지만 그 욕망구조 외에 아무런 대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lt;/SPAN&gt; &lt;/P&gt;&lt;br /&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런 상황에서 정당체제의 공고화라는 얘기는 공허할 뿐이다. 정당체제의 공고화가 사람들의 요구를 반영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이런 일상의 장이나 욕망구조를 변화시키리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lt;/SPAN&gt; &lt;/P&gt;&lt;br /&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물론 정당이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런 정당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정당을 만드는 과정과 촛불행진은 구분되어야 한다. 지금 촛불행진이라는 그릇이 담아야 할 내용은 일상의 장과 욕망구조를 변화시킬 전략이다. 그리고 그 전략에서 중요한 부분은 각자가 자신의 얘기를 건네며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이야기 마당’이다.&lt;/SPAN&gt; &lt;/P&gt;&lt;br /&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다행히 촛불행진에서 그런 이야기 마당이 이미 조금씩 펼쳐지고 있지만 아직 ‘공생의 정치’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 사실 쇠고기, 한미FTA, 대운하, 민영화 등은 각기 다른 내용처럼 보이지만 분리되지 않았다. 그것은 ‘경제적 이윤’이라는 틀로 묶여 있다. 그런 경제적 이윤의 논리가 쇠고기를 수입하고 FTA를 맺으며 대운하를 파고 민영화와 무한경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공생의 정치는 그 근본에 놓인 이윤의 논리를 공격하는 유효한 전략이다. 그리고 언제나 권력은 사람들을 서로 찢어 놓으며 지배하려 드는데, 공생의 정치는 ‘분할통치’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전술이다.&lt;/SPAN&gt; &lt;/P&gt;&lt;br /&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미 촛불집회 내에서 자라나고 있는 이런 잠재력이 잘 자라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한다. 지금 당장 촛불행진에 관해 걱정하거나 무조건 낙관할 필요가 없다. 그 행진은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lt;/SPAN&gt; &lt;/P&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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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14</guid>
			<comments>http://jihaeng.net/blog/114#entry114comment</comments>
			<pubDate>Wed, 04 Jun 2008 17:10:07 +0900</pubDate>
		</item>
		<item>
			<title>이명박 정부 &#039;패배&#039;의 이유(김윤철)</title>
			<link>http://jihaeng.net/blog/113</link>
			<description>&lt;DIV style=&quot;FONT: 10pt 굴림&quot;&gt;&lt;FONT face=돋움 size=2&gt;* 이번글은 촛불시위 특집기획 3번째 글이 나가기 전에 &#039;번외본&#039;으로 나가는 글입니다. &lt;/FONT&gt;&lt;/DIV&gt;
&lt;DIV align=left&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face=돋움 size=2&gt;&lt;/FONT&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face=돋움 size=2&gt;&lt;STRONG&gt;이명박 정부 ‘패배’의 이유,&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face=돋움 size=2&gt;&lt;STRONG&gt;‘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의 부재&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face=돋움 size=2&gt;김윤철&lt;br /&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촛불시위 현장과 여의도 정가를 오가는 기자들 몇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쇠고기 파동’ 정국에서 이명박 정부의 ‘패배’가 ‘대세’라고 한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lt;FONT face=돋움 size=2&gt;촛불시위 정국, 이명박 정부의 패배가 대세&lt;/FONT&gt;&lt;/STRONG&gt;&lt;/DIV&gt;
&lt;DIV&gt;&lt;STRONG&gt;&lt;/STRONG&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그 패배의 후과마저도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서민들이 짊어지게될 가능성이 있어, 이명박 정부의 패배를 곧 ‘시민의 승리’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난 그 말에 크게 이의를 달고 싶지 않다. 승자가 없다고 패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승리와 패배의 요인은 각기 따로 있는 가운데, 무엇이 먼저 더 강하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승자가 먼저 있을 수도, 패자가 먼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왜 분명한 승자가 나오기도 전에 먼저 패자가 되었는가?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lt;STRONG&gt;대통령의 치명적인 질문&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평소 친분이 있는 ‘30대 중반의 젊은 엘리트’가 있다. 그는 ‘주요 국가기관’에서 일하며 나라의 녹을 먹고 있다. 그가 며칠전 만난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아마도 언론에 보도된 것이긴 할 터인데, 최근 기껏해야 모 방송국의 24시간 TV 뉴스 정도만 보는 나로서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촛불시위 현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보고자에게 했다는 말에 관한 것이다. 몇 명이 참가하고 있는지, 무슨 구호를 외치고 있는지, 그야말로 ‘현황’을 보고한 그에게 이대통령은 “내가 그런 보고를 듣고 있어야 하느냐...누가 주동하고 있는지 등을 보고해야 하는게 아니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통령은 아마도 단순 ‘현황보고’가 아니라 보다 심도있는 ‘현황 분석 보고’를 원했던 것이다. 뭐 대통령으로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보다 적절한 상황 판단을 할 수 있는 보다 ‘핵심적인’ 정보, 즉 ‘배후’에 관한 정보를 원할 수 있겠다 싶으니까 말이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하지만 그 젊은 엘리트는 그런 대통령에 대해 ‘한심하다’고 평하며, 그런 태도로 사태수습이 되겠냐고 반문했다. 왜 한심하다는 것일까? “새 시대를 여는 첫차인줄 알았더니 구시대의 막차였다.” ‘노간지’가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 했던 말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에서 민주화 운동세력마저 ‘낡은 세력’일 수 밖에 없었던 ‘변화’. 그 변화를 이명박 대통령이 ‘CEO답지 않게’ ‘민주화 이전의 산업화’ 시대의 사고틀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하냐고? 대통령이 그토록 알고 싶어하던 그 ‘누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이다. 대통령이 좀 더 시대를 ‘영민하게’ 읽어내는 ‘고품격 CEO’의 자질을 갖고 있는 자였다면, 그는 보고자에게 이렇게 물어봐야했다. “왜 ‘운동권’들이 힘을 못쓰냐”라고. “왜 ‘어여쁜 아이들’이 그리 난리냐”고.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lt;STRONG&gt;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만든다&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누가 배후냐”라는 대통령의 질문은 사실상 ‘권위에 의존한 일방적 지시’에 다름 아닌 ‘가장 질 나쁜’ 물음이다. 그 질문 하나가 세상의 변화를 읽을 여유를 잃게 하면서, ‘강경진압’과 같은 ‘민주화 이전-이전(pre-pre) 시대’의 공권력 운용방식-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의 기술-을 다시 불러냈다는 사실. 이대통령은 그것을 알고 있을까?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이명박 정부의 이번 패배가 ‘기나긴 패배의 여정’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모른다. 만약 그들이 이번 촛불시위로부터 ‘낡은 틀에의 의존’이 얼마나 커다란 폐해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배움을 갖고자 한다면, 패배는 일시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이 ‘촛불을 끄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상기해낸다면, 그나마 패배의 파급적 효과를 줄일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그들의 경쟁자들-야당과 진보 개혁 운동 세력 등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들-이 좋은 질문에 걸맞는 좋은 답을 구하지는 못한 것 같으니 말이다. &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lt;STRONG&gt;정부는 &#039;질문 던지기 놀이&#039;에 몰입하라&lt;/STRONG&gt;&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하지만 집권의 목적이 패배의 최소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좋은 질문 던지기’에 몰입해야할 듯 하다. 새로운 시대에의 적응을 위해, 정부가 궁금한 것이 많은 어린 아이의 끊임없는 질문 던지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촛불 시위 자체가 어여쁜 아이들의 나라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 던지기에서 시작된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빠, 나라가 왜 이 모양이에요?”&lt;/FONT&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 지난 글들은 &lt;A href=&quot;http://jihaeng.net/&quot;&gt;http://jihaeng.net&lt;/A&gt; 정치사회비평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lt;/FONT&gt;&lt;/DIV&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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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사회비평</category>
			<author>(지행네트워크)</author>
			<guid>http://jihaeng.net/blog/113</guid>
			<comments>http://jihaeng.net/blog/113#entry113comment</comments>
			<pubDate>Mon, 02 Jun 2008 16:57:26 +0900</pubDate>
		</item>
		<item>
			<title>제도 정치의 종언, 삶 정치의 출현(이명원)</title>
			<link>http://jihaeng.net/blog/112</link>
			<description>&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039;촛불시위&#039; 특집기획-2]&lt;/FONT&gt;&lt;/DIV&gt;
&lt;DIV align=center&gt;&amp;nbsp;&lt;/DIV&gt;
&lt;DIV align=center&gt;&lt;FONT face=돋움 size=2&gt;제도 정치의 종언, 삶 정치의 출현&lt;/FONT&gt;&lt;/DIV&gt;
&lt;DIV align=left&gt;&amp;nbsp;&lt;/DIV&gt;&lt;FONT face=돋움 size=2&gt;
&lt;DIV align=center&gt;&lt;br /&gt;이명원&lt;/DIV&gt;
&lt;DIV align=center&gt;(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 제도 정치인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의 대중들에게 제도 정치는 바야흐로 ‘종언’을 맞이했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이 주장은 ‘87년 체제의 종언’이나 ‘97년 체제의 작동’이라는 주장보다도 더욱 과격한 주장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리 과격한 주장도 아니라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amp;nbsp;쇼같지도 않은 쇼&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 과감하게 말하자면, 오늘의 대중들에게 청와대나 여의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제도정치는 이미 진부한 ‘스펙터클’로 인식되고 있다. 한때 한국정치의 스펙터클은 화려한 구경거리였지만 이제는 진부해졌고, 감당할 내용을 상실한 지극히 덧없는 것이며, 요즘 유행하고 있는 어느 모바일 폰 제품의 광고 문구처럼 결국 ‘쇼’에 불과한 것으로 귀착되었다. 오늘의 제도 정치는 오직 ‘카메라’를 향해 있지, 정치적 주권자인 ‘국민’을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을 촛불을 든 국민들은 충분히 간파하고 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의 제도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라는 아이러니의 산물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대통령을 포함한 청와대의 집권세력은 ‘국익’을 말하고 번번이 ‘법’의 엄정한 집행을 이야기하지만,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국민들은 거의 없다. ‘국익’이라는 기표 아래서 자행되는 일들이란, 사실 대중들의 삶의 안정성을 급격하게 요동치게 만들고, 심지어는 붕괴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미 대중들은 잘 알고 있다. ‘법’의 엄정한 집행을 이야기하지만, ‘강부자’와 ‘고소영’으로 구성된 집권세력이 어떻게 위법과 탈법을 정당화하고 있는지를 매일매일 확인하고 있는 대중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엄숙한 표어가 의미론적 깊이나 밀도와는 무관한 제스처, 곧 스펙터클하긴 하지만 정치적 정념이나 파토스의 고양에는 전혀 기여할 수 없는 저급한 ‘쇼’ 정도로 간주하는 것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STRONG&gt;&amp;nbsp;민주당도, 진보정당도 비관적&lt;br /&gt;&lt;/STRONG&gt;&amp;nbsp;&lt;br /&gt;&amp;nbsp; 정치행위의 정당성을 구성하는 ‘진정성’에 대한 호소는 정치인들 그 자신들에 의해서 번번이 배신당하고 있다. 이 배신감이 누적되다 보니 대중들 역시 ‘정치적 냉소주의’로 손쉽게 비난당하곤 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당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된 제도 정치의 낡아빠진 퍼포먼스를 간파할 수 있는 ‘징후발견적 독해력’이 오히려 탄탄해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은 ‘선진화’ 운운하는 번쩍이는 담론으로 정권을 잡은 듯 자신만만해 하지만, 초등학생부터 성인에 이르는 대중들의 대다수는 그 ‘후진적인’ 삽질 정치 퍼포먼스에 벌써부터 치를 떨고 있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 동시에 대중들은 군소야당으로 전락한 통합민주당에 대한 기대도 접은 지 오래다.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은 정치적 이항대립 구조 속에서의 ‘차별화 경쟁’을 통해, 끼리끼리 공생공락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중들의 정치적 요구가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가파른 국면에서만 ‘차이’를 발생시킴으로써, 서로가 완전히 대립적인 정치적 지향과 가치를 보여주는 것처럼 위장하지만, 사실 그 본질에 있어서는 ‘가족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를 구상한 것은 통합민주당이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것은 한나라당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끈질긴 메커니즘의 지속을 보여줄 뿐이거나, 대중들에게 그렇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창조한국당을 포함한 정치세력은 앞의 두 정당의 위족(僞足)에 불과한 것이어서, 정치적 ‘상수’가 아닌 ‘변수’에 불과한 것이어서, 대중들은 씁쓸한 부조리극의 관점에서 이들 정치세력을 관조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정당이 오늘의 현실에서 대안정당으로서 일취월장할 수 있는가 하면, 이 점도 비관적이다. 대중적 관점에서 보자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그리고 사회당과 같은 진보정당들은, 정치라는 ‘극장’에서는 가장 분명한 지지층이 결집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치 미술관에 걸려 있는 고급 모더니즘 회화를 감상하는 소수의 관람객의 존재와 같이 ‘마니아(mania) 정당’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 한국의 ‘정치극장’에서 상연되는 제도정치의 스펙터클은 매우 진부한 장르문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기치 못한 쇠고기 정국에서, 이들은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정치관객들(대중)의 반응을 살피면서, 진부하게도 무딘 이빨을 드러내며 대립하는 흉내를 내지만, 농수산부장관 해임안 의결에서 나타난 것처럼, 쾌적한 흥행 드라마에 요구되는 카타르시스나 극적 반전의 묘미를 전혀 연출하지 못할 정도로 한심한 ‘연출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대중들의 요구에 떠밀려 강요된 ‘배역’을 그럭저럭 감당하고자 애쓰고 있지만, 문제는 드라마 소비의 결정적 이유일 ‘감동’이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 &lt;STRONG&gt;그들의 태극기가 의미하는 것&lt;/STRONG&gt;&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 대중들은 이들 제도 정치세력들이 본질적으로는 자기이익에만 충실한 ‘정치계급’이라는 길드의 공동성원이라는 사실을 잘 간파하고 있다. 동시에 대중들은 이들의 정치적 ‘쇼’가 교과서적 의미에서의 국가의 존재근거와 민주주의의 이념에서도 한참 후퇴해버린 시대착오적 플롯의 소산이라는 점에 분노하고 있다. 동시에 대중들의 생각에는 이들 정치세력들이 입만 벌리면 떠들고 있는 ‘대한민국’이 대중들이 생각하는 ‘진짜 대한민국’과 전혀 다른 성격이라는 사실을 각성하고 있다. 대중들의 솔직한 문화적 감각 속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미 ‘두 나라’로 쪼개져 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br /&gt;&amp;nbsp; 오늘의 ‘촛불시위’에 나서고 있는 대중들은 주기도문 비슷한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즉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소망을 패러디하여, “헌법이나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는 국가의 상식적이면서도 중성적(neutral)인 의미와 기능이 현실 속에서 재현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촛불대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대체로 민족주의와 무관하다. 이들은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국가의 자존심’과 ‘국민의 권리’를 환기하고 있을 뿐, 반미(反美)니 친미(親美)니 하는 관념은 이들에게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명명하자면 이들 촛불대중을 비미(非美)주의자로 지칭하는 것이 오히려 사실에 가깝다. 그게 미국이든 북한이든 ‘촛불대중’에게 중요한 것은 ‘미친 소’인 것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 그러나 이 상식적인 감성이 좌와 우의 이데올로기적 개념규정, 가령 진보적인 ‘좌파소녀’라는 평가로부터 ‘반미 배후세력의 선동에 놀아난 대중’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선전선동과 공권력에 의한 물리적 탄압에 거듭 직면하게 된다면, 이들은 스스로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문법의 ‘삶의 정치’를 오히려 명료하게 진화시켜 나갈지도 모른다. 진부한 제도 정치 컨텐츠에 대한 소비를 전면적으로 중단하는 불매운동은 물론, 무능한 제도 정치극장의 폐쇄를 ‘상징적으로’ 명령할 수도 있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 거리에 선 ‘촛불대중’은 지금 종언에 이른 제도정치의 한계상황을 날카롭게 환기시키면서, 이전에는 존재한 바 없었던 새로운 장르의 ‘삶 정치’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거듭된 리허설을 감행하고 있다. 물론 이 리허설은 최초 단계에서는 대본도 없고 플롯도 없는 느슨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권력에 의한 물리적 탄압의 강도가 높아지고, 대중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한 정치계급들의 무시와 비대언론의 여론조작이 계속된다면, 대본의 내용과 형식은 매우 ‘전위적’으로 수정될 확률이 높다. 제도정치를 지탱해 온 낡아빠진 컨텐츠의 퇴출이 임박해 오고 있는 것이다.&amp;nbsp;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 대안지식연구회 정치사회비평 지난 글들은 &lt;A href=&quot;http://jihaeng.net/&quot;&gt;http://jihaeng.net&lt;/A&gt;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lt;br /&gt;&lt;/DIV&gt;&lt;/FONT&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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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8 May 2008 15:44:2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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